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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이화 시인 / 새빨간 거짓말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31.
박이화 시인 / 새빨간 거짓말

박이화 시인 / 새빨간 거짓말

 

 

먹다 보면

껍질만 남는 것이 석류다

먹으면 먹을수록 새빨간 껍질만 쌓이는

 

사랑하고부터 거짓말도 늘었다

생각만 해도 신트림 끄윽 괴는

그 새콤달콤한 말 들키지 않으려

석류처럼 석류꽃처럼

내 입술도 반지르르 붉어졌다

 

익다 보면 제풀에 단내 쩌억 풍기는

벗기다 보면 겉과 속이 한통속인

석류 한 통 다 먹고 나니 거짓말처럼

석류보다 더 많은 껍질이 쌓였다

단물 쏙 빠진 알맹이까지 시금털털 껍질로 남았다

 

생이 아름답다는 건 거짓말

사랑에 온통 정신팔려

영영 지울 수 없는 얼룩만 남긴

 

생이 아름답다는 건 거짓말

석류보다 석류꽃보다 더 새빨간 거짓말

 

 


 

 

박이화 시인 / 겨울동백

 

 

 아이러니하게도 언제 누군가의 칼날에 죽어갈지 모르는 비운의 武士들이 오히려 그 죽음의 향연을 즐겼단다. 그래서 투구 속에 귀한 향을 넣어 제 목이 떨어지는 순간 그 진동하는 향기로 살아남은 적에게 더 큰 승리의 도취감을 선사했단다. 그렇다면! 저 푸르고 질긴 잎으로 무장한 동백 한 그루. 그도 이미 그 붉은 투구 속에 향기로운 죽음을 준비했던 걸까? 그래서 허공을 가르는 한 줄기 바람 앞에 저렇듯 모가지 댕겅 떨구며 낭자한 향기 콸콸 쏟아내는 걸까? 그리하여 승승장구하여 달려 온 봄에게 더 큰 희열 만끽하게 하도록!

 

 


 

 

박이화 시인 / 도개리 복사꽃

 

 

내 몸 속 어디 숨겨진 복사뼈 있듯

우리 언제 한 몸이었던 적 있었는지

내 입술과 유두

저 연분홍 꽃잎이었던 적 있었는지

거뭇한 북쪽 가지 끝의 저 은밀한 홑꽃

일만 년 전쯤

내 음순이었던 적 있었는지

 

그리하여

 

나, 오래 전 하나였던

그 몸을 잊지 못하는 듯

이렇듯 꽃 같이 붉은 생리혈 비쳐오면

내 몸은 무작정 아픕니다

복사꽃 피는 그 사나흘처럼

내 몸도 한 사나흘쯤

밤낮없이 그리움 멍울멍울 쏟으며 아픕니다

 

 


 

 

박이화 시인 / 만월

누군가 한 달에 한번

노을처럼 붉디붉은 잉크로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미루어 짐작컨대

달과 주기가 같은 걸로 봐서

멀리 태양계에서 보내는 것으로만 알뿐

어쨌든 그때마다 내 몸은

달처럼 탱탱 차 오르기도 하고

비릿한 갯벌 냄새 풍기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편지

찔끔, 엽서처럼 짧아지더니

때로는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 갈 때도 있다

아마 머잖아 달빛으로 쓴 백지편지가 될 것이다

불립문자가 될 것이다

 

허나 그것이 저 허공 속 만개한 이심전심이라면

이렇듯 일자 소식 없는 것이 폐경이라면

저 만면 가득한 무소식이야말로 환한 희소식

누군가의 말대로 내 몸 이제 만월에 들겠다

 

 


 

 

박이화 시인 / 나의 포르노그라피

 

 

썩은 사과가 맛있는 것은

이미 벌레가

그 몸에 길을 내었기 때문이다

뼈도 마디도 없는 그것이

혼신을 다해

그 몸을 더듬고, 부딪고, 미끌리며

길을 낼 동안

이미 사과는 수천 번의 자지러지는

절정을 거쳤던 거다

그렇게

처얼철 넘치는 당도를 주체하지 못해

저렇듯 달큰한 단내를 풍기는 거다

 

봐라!

한 남자가 오랫동안 공들여 길들여 온 여자의

저 후끈하고

물큰한 검은 음부를!

 

 


 

 

박이화 시인 / 백야

 

 

 모텔 설원의 맑고 투명한 전망창으로 바라보이는 설경은 밤 깊을수록 점점 깊은 정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여기 낯설고 허허로운 타지에서 너 사랑아 비밀에 부쳐져 가슴 쩌억 붙을 추억 안 될까? 노변 주차장에 가랑잎 마냥 떨며 웅크리고 잠든 차량들 그 중 가장 입 무거울 놈으로 하나 깨워 달팽이처럼 고요히 아름답게 우리 만나고 싶어 야경꾼같이 또록또록 깨어있던 도시의 불빛마저 오늘은 혼곤히 잠들어버린 아니, 너무 깊은 애무에 자물쳐버린 이 밤, 사랑하고 싶어 이 그리움의 눈보라도 잠시, 멈추어 줄까?

 

-시집 『그리운 연어』 (도서출판 애지, 2006) 수록

 

 


 

 

박이화 시인 / 잠들면 다 꿈이고

 

 

담장 밖을 넘나드는 넝쿨 때문에

울안에 심지 말라는 능소화가

가슴에 커다란 주흥 글씨를 달고서는

해마다 아프게 꽃을 피우고 있다

 

지을 수 없는 낙인처럼

저 주흥의 꽃가루에 눈멀 수 있다는

흉흉한 소문도 있지만

그렇게 눈멀어서인지

사랑에 눈멀어서인지

날벌레 한 마리 그 속에 파르르 졸고 있다

 

잠들면 다 꿈이고

꿈은 언젠간 깨는 것이어서

누구라도 맹목의 사랑 앞에선

꿈꾸듯 눈이 머는지

깨어나기 전까지

저 하루살이도 꿈에선 꽃일 터

 

그러나 꿈은 길어도 하룻밤

그 바람 앞의 단잠 깨우지 않으려

꽃도 향도 모르는 척 담장 밖을 서성이는데

 

누구

꿈과 사랑의 차이를 아시는지

꿈은 꿈인 줄 모른 채 울다 깨어나도

사랑은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날수 없는....

 

 


 

 

박이화 시인 /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가

 

 

꽃 지고 나면 그 후는

그늘이 꽃이다

 

마이크도 없이

핏대 세워 열창했던 봄날도 가고

그 앵콜 없는 봄날 따라

꽃 지고 나면

저 나무의 18번은 이제 그늘이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가

 

한 시절

목청 터져가 불러재꼈던 흘러간 노래처럼

꽃 지고 난 그 후

술 취한 듯 바람 등진 채

비틀거리며 휘청거리며

부르는 저 뜨거운 나무의 절창

그래서 저 그늘

한평생 나무를 떠나지 못하는 거다

 

그늘만큼 그 젖은 얼룩만큼

나무는 푸르른 거다

 

설령 사랑도 꽃도

한 점 그늘 없이 피었다 그늘 없이 진다해도

누군가 들었다 떠난 퀭한 자리마다

핑그르 눈물처럼 차오르는 그늘

꽃 지고 난 그 후는

모든 그늘이 꽃이다

 

마스카라 시커멓게 번진

검은 눈물꽃이다

 

 


 

박이화 시인

1960년 경북 의성 출생. (본명: 기향(己香) 대구가톨릭대학교 국문과와 경운대학교 사회체육학과 대학원 졸업. 1998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 『그리운 연어』 『흐드러지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