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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화 시인 / 새빨간 거짓말
먹다 보면 껍질만 남는 것이 석류다 먹으면 먹을수록 새빨간 껍질만 쌓이는
사랑하고부터 거짓말도 늘었다 생각만 해도 신트림 끄윽 괴는 그 새콤달콤한 말 들키지 않으려 석류처럼 석류꽃처럼 내 입술도 반지르르 붉어졌다
익다 보면 제풀에 단내 쩌억 풍기는 벗기다 보면 겉과 속이 한통속인 석류 한 통 다 먹고 나니 거짓말처럼 석류보다 더 많은 껍질이 쌓였다 단물 쏙 빠진 알맹이까지 시금털털 껍질로 남았다
생이 아름답다는 건 거짓말 사랑에 온통 정신팔려 영영 지울 수 없는 얼룩만 남긴
생이 아름답다는 건 거짓말 석류보다 석류꽃보다 더 새빨간 거짓말
박이화 시인 / 겨울동백
아이러니하게도 언제 누군가의 칼날에 죽어갈지 모르는 비운의 武士들이 오히려 그 죽음의 향연을 즐겼단다. 그래서 투구 속에 귀한 향을 넣어 제 목이 떨어지는 순간 그 진동하는 향기로 살아남은 적에게 더 큰 승리의 도취감을 선사했단다. 그렇다면! 저 푸르고 질긴 잎으로 무장한 동백 한 그루. 그도 이미 그 붉은 투구 속에 향기로운 죽음을 준비했던 걸까? 그래서 허공을 가르는 한 줄기 바람 앞에 저렇듯 모가지 댕겅 떨구며 낭자한 향기 콸콸 쏟아내는 걸까? 그리하여 승승장구하여 달려 온 봄에게 더 큰 희열 만끽하게 하도록!
박이화 시인 / 도개리 복사꽃
내 몸 속 어디 숨겨진 복사뼈 있듯 우리 언제 한 몸이었던 적 있었는지 내 입술과 유두 저 연분홍 꽃잎이었던 적 있었는지 거뭇한 북쪽 가지 끝의 저 은밀한 홑꽃 일만 년 전쯤 내 음순이었던 적 있었는지
그리하여
나, 오래 전 하나였던 그 몸을 잊지 못하는 듯 이렇듯 꽃 같이 붉은 생리혈 비쳐오면 내 몸은 무작정 아픕니다 복사꽃 피는 그 사나흘처럼 내 몸도 한 사나흘쯤 밤낮없이 그리움 멍울멍울 쏟으며 아픕니다
박이화 시인 / 만월 누군가 한 달에 한번 노을처럼 붉디붉은 잉크로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미루어 짐작컨대 달과 주기가 같은 걸로 봐서 멀리 태양계에서 보내는 것으로만 알뿐 어쨌든 그때마다 내 몸은 달처럼 탱탱 차 오르기도 하고 비릿한 갯벌 냄새 풍기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편지 찔끔, 엽서처럼 짧아지더니 때로는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 갈 때도 있다 아마 머잖아 달빛으로 쓴 백지편지가 될 것이다 불립문자가 될 것이다
허나 그것이 저 허공 속 만개한 이심전심이라면 이렇듯 일자 소식 없는 것이 폐경이라면 저 만면 가득한 무소식이야말로 환한 희소식 누군가의 말대로 내 몸 이제 만월에 들겠다
박이화 시인 / 나의 포르노그라피
썩은 사과가 맛있는 것은 이미 벌레가 그 몸에 길을 내었기 때문이다 뼈도 마디도 없는 그것이 혼신을 다해 그 몸을 더듬고, 부딪고, 미끌리며 길을 낼 동안 이미 사과는 수천 번의 자지러지는 절정을 거쳤던 거다 그렇게 처얼철 넘치는 당도를 주체하지 못해 저렇듯 달큰한 단내를 풍기는 거다
봐라! 한 남자가 오랫동안 공들여 길들여 온 여자의 저 후끈하고 물큰한 검은 음부를!
박이화 시인 / 백야
모텔 설원의 맑고 투명한 전망창으로 바라보이는 설경은 밤 깊을수록 점점 깊은 정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여기 낯설고 허허로운 타지에서 너 사랑아 비밀에 부쳐져 가슴 쩌억 붙을 추억 안 될까? 노변 주차장에 가랑잎 마냥 떨며 웅크리고 잠든 차량들 그 중 가장 입 무거울 놈으로 하나 깨워 달팽이처럼 고요히 아름답게 우리 만나고 싶어 야경꾼같이 또록또록 깨어있던 도시의 불빛마저 오늘은 혼곤히 잠들어버린 아니, 너무 깊은 애무에 자물쳐버린 이 밤, 사랑하고 싶어 이 그리움의 눈보라도 잠시, 멈추어 줄까?
-시집 『그리운 연어』 (도서출판 애지, 2006) 수록
박이화 시인 / 잠들면 다 꿈이고
담장 밖을 넘나드는 넝쿨 때문에 울안에 심지 말라는 능소화가 가슴에 커다란 주흥 글씨를 달고서는 해마다 아프게 꽃을 피우고 있다
지을 수 없는 낙인처럼 저 주흥의 꽃가루에 눈멀 수 있다는 흉흉한 소문도 있지만 그렇게 눈멀어서인지 사랑에 눈멀어서인지 날벌레 한 마리 그 속에 파르르 졸고 있다
잠들면 다 꿈이고 꿈은 언젠간 깨는 것이어서 누구라도 맹목의 사랑 앞에선 꿈꾸듯 눈이 머는지 깨어나기 전까지 저 하루살이도 꿈에선 꽃일 터
그러나 꿈은 길어도 하룻밤 그 바람 앞의 단잠 깨우지 않으려 꽃도 향도 모르는 척 담장 밖을 서성이는데
누구 꿈과 사랑의 차이를 아시는지 꿈은 꿈인 줄 모른 채 울다 깨어나도 사랑은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날수 없는....
박이화 시인 /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가
꽃 지고 나면 그 후는 그늘이 꽃이다
마이크도 없이 핏대 세워 열창했던 봄날도 가고 그 앵콜 없는 봄날 따라 꽃 지고 나면 저 나무의 18번은 이제 그늘이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가
한 시절 목청 터져가 불러재꼈던 흘러간 노래처럼 꽃 지고 난 그 후 술 취한 듯 바람 등진 채 비틀거리며 휘청거리며 부르는 저 뜨거운 나무의 절창 그래서 저 그늘 한평생 나무를 떠나지 못하는 거다
그늘만큼 그 젖은 얼룩만큼 나무는 푸르른 거다
설령 사랑도 꽃도 한 점 그늘 없이 피었다 그늘 없이 진다해도 누군가 들었다 떠난 퀭한 자리마다 핑그르 눈물처럼 차오르는 그늘 꽃 지고 난 그 후는 모든 그늘이 꽃이다
마스카라 시커멓게 번진 검은 눈물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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