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광임 시인 / 불멸의 사랑
화분 위에 숯덩이 하나씩 올려놓고 숯을 피해 화분에 물을 주곤 하였는데 깊은 밤, 톡 톡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마디 하나하나 추슬러 뼈를 세우는 것일까 침대 옆 벤저민 화분 위 스멀스멀 기어오른 수분만으로도 금세 제 몸에 물길을 내고 생의 뿌리 움켜쥐고 한때 푸르렀던 나무 푸석한 몸뚱이 흔들어 깨워 뼈와 살을 채우며 장작 타는 소리 내고 있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뼈마디 곧추세워 아득히 되살아나는 불 여한 없이 태우고도 한 토막 숯으로 앉아 나머지 소신공양을 준비하는 것인가 죽어서도 죽지 않은 삶의 화분이 되는 날이면 긴 밤을 앓는다, 벤저민 잎들 무성하다
최광임 시인 / 대숲에서
눈 오는데 나의 애인은 눈이 온다고만 하고 나도 눈이 온다고만 하고
눈 오는데 그대는 올곧은 대나무 같기만 하고 나는 대숲 밖으로 부는 바람 같기만 하고
눈 오는데 당신은 말도 못하고 제 몸만 비비고 나는 그대의 소리가 되고 싶어 언저리 맴돌기만 하고
숲에 목맨 여인의 신음소리였다가 풍장한 아기 울음소리였다가 풀섶을 기는 뱀의 소리였다가 때로는 뽕잎 갉아먹는 누에의 입질 소리였다가 풀 먹인 속치마 스치는 소리였다가 이불 속 뜨거운 살들의 소리였다가 쩡쩡 언 땅 속 구근으로부터 뿜어 올리는 대숲에 든 것들의 숨통 틔우는 소리 우우 눈발이 안으로 안으로 기어들고 숲이 까르르 옷깃을 풀어 헤치고
최광임 시인 / 문어숙회 먹는 밤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지 못한 여자와 남자가 카멜레온형 인재가 되지 못한 여자와 남자가 문어숙회를 사이에 두고 도란거린다 또 한 번의 봄은 턱밑까지 차오르는 중이고 여자가 맥주에 소주를 만다 넘치지 않게 술 따르는 법은 용케도 익힌듯하나 생이란 게 변변치 못해 팔팔한 적 없어, 서로에게 숙회감도 되지 못하였으나 귀는 순하여 참도 잘 들어 준다 한참만에야 문어 한 점 입 에 넣다가 사람이나 문어나 사는 게 애옥살이라는 듯 혼자서는 무엇을 해도 안 되는 세상이라고 중얼거리는 남자의 행간에 노후가 펄럭인다 여자와 남자가 합쳐야 고작 팔완목이겠으나 여덟 개의 다리로도 육지로 끌려나온 돌문어 가난을 합쳐본들 늙음 뿐이 더 늘겠는가마는 함께 일할 생각 없냐고 묻는 남자 앞에서 같이 살자는 말로 해석해 버릴까 늙은 여자 더딘 계산을 하는 밤이다
최광임 시인 / 못질
떨어진 옷걸이, 그 자리에 못질을 한다 머리에 철퇴를 당하면서도 제 길 쉽사리 파지 않는 못이나, 제 몸의 틈 내주지 않는 벽 사이 펜찌에 못을 물리고 있는 힘 다해 망치질한다 소리의 크기만큼 서로를 밀어내는 힘 못의 머리에 불꽃이 인다, 한때 나와 그 사람 서로 못이고 벽이었던 적 있다 비로소 든든해지던 삶 자고 나면 한 뼘씩 메워지던 허공 우리의 세간은 봄날 복사꽃 같 았다 봄은 여우와 같아서 자주 변덕을 부렸지만 헐거워지는 틈에서도 아슬아슬 꽃 피고 지는 사이 몇 번의 바람과 몇 번의 비 가 다녀갔고 삶은 무르익기도 전에 낙과를 하고는 했다. 그럴수록 과수원 나무들 창이 되어 날아들고, 잡은 손 누가 먼저 놓았는 지 벽의 못 방바닥에 뒹굴기도 했다 낙과를 주어들고 못질한다 상처도 사는 힘, 이어서 봉인된 구멍에서 트는 싹 봄이다
최광임 시인 / 두꺼운 옷 입고 있었다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밥 때를 비켜 혼자 아무렇게나 끼니를 때우는 일이다 식은 밥에 고추장 얹고 통깨 몇 알 뿌려 비빌 때 의 느낌과 타월로 제 몸을 밀 때의 퍽퍽함이나 같은 일이다 싱크대 위, 흐린 햇살을 쳐놓고 선 채로 쓸쓸함을 뜬다 식도를 타고 오르는 간밤의 취기 나말고 또 누구를 만났었던가 붉은 밥수저 안에서 역류성 식도염이 따끔거린다 사람들은 저마다 두꺼운 옷 을 입고 있었다 겹겹의 웃음이 번지고 있지만, 장기 공연하는 배우들 같았다 말이 건배를 하고 술잔이 건배할 때도 형광등보다 도수 높은 쓸쓸한 눈빛들, 외투 속 어깨를 심하게 들먹이며 골목 어디로 흩어지던 사람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보다 사랑 줄 누군가가 없다는 것은 더 쓸쓸한 일이다 사랑이 없다는 것과 사랑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다른 일 유치환의 행복이, 한도 초과 카드 명세표처럼 거치적거린 날 살얼음 얼던 간밤의 거리는 무표정하다 누군가 혼자서 밥을 뜨고 두꺼운 외투를 걸치는 하루
최광임 시인 / 이상한 날
수술 환자가 마취에서 덜 깨인 듯한 날이었다 지나간 버스 꽁무니를 따르는 비포장 길 흙먼지 같기도 했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도로 위 차들 뿐이었고 포도밭의 포도송이는 수의를 입은 채 땅바닥에 떨어졌다 오전 열 시가 무기력한 표정으로 껌벅껌벅 지나 갔고 야윈 두루미 몇 마리 가파른 공중에 날개를 걸치고 있었다 나무의 손들은 조용히 하늘을 향해 모아져 있었지만 기도는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 듯했다 생명을 가진 것들은 안개보다 더 희멀건 해져갔다 푸른 독이 올라있어야 할 벼이삭에서는 연두비린내가 나고 있었다 버스 안 사람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으나 염분 빠진 생선들 같았다 구부정한 어깨로 시계는 오후 네 시를 지나가고 있었고 세상은 귀가 시간도 아닌데 귀가를 서두르고 있었다 오늘도 태양은 전쟁에서 패했다는 소문만 퍼졌다 나는 습관 처럼 내일 버스를 탔다가 빈혈 앓는 오늘을 버스에 실었다 놓쳐버린 무엇인가 아귀틀린 톱니바퀴처럼 삐걱대기 시작했다 밤의 어둠을 견디는 일은 어둠이 아니었었다 절망일 때 절망을 견디는 일 따윈 절망이 아니었었다,라고 불완전한 내일 속으로 관성의 버스가 달리며 바람을 만들었다 도로변 플라타너스, 커다란 손바닥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광임 시인 / 휴일, 붉은 혹은 검은
며칠째 휴일인데요 떨이도 되지 않는 두어 물 간 생선 같은 날들이네요 궁둥이를 이고 걷는 할머니의 어물전 손가락만 닿아도 살점 문드러지는 물고기들 같아요 희멀겋게 백태 낀 물고기 눈에 잠긴 바다나 떠올리는 나도 며칠째 팔리지 않는 할머니의 생선 이네요 한 번은 오들오들 울다 먹오디처럼 잠들었고요 하루는 대청마루에 앉아 산허리를 치켜세우는 구름을 보았는데요 구름이 자꾸 부연해지면 바람의 소리만 사나워지네요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내가 난청이기 때문일까요 주인 잃은 소리는 갈비뼈 사이 그물을 치고 세상 밖의 파도란 파도 죄다 불러 앉히곤 하네요 적요에 익숙지 못한 심장이 용마루에 앉았다 대숲으로 뛰어내려요 파리 한 마리 날지 않는 어물전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죽창 같은 무서움의 뼈들 몸 뚫고 자라 내 숨을 찌른 탓인데요 개에게 물린 어둠이 팽팽해질수록 한 움큼 쏟아지는 왕소금에 속수무책으로 팔딱이던 활어를 떠올려요 어둠에 익숙지 못한 것은 전등 뒤를 걱정하는 것일 텐데요 부나비도 한 번쯤은 자신의 등을 보았을까요 짊어진 짐도 없이 근심만 태산인 것들 뻐꾸기가 동쪽에서부터 어둠을 쪼아 오네요 그러니 저 소리도 여직껏 노래가 아니라 구업(口業)이었던 걸까요 백태 낀 눈에서 짭짤한 바다 둥실 떠오른다 해도 어쩌죠, 익숙해지는 이 어둠은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광찬 시인 / 눈사람 만들기 외 6편 (0) | 2025.12.31 |
|---|---|
| 정끝별 시인 / 시 속에서야 쉬는 시인 외 6편 (0) | 2025.12.31 |
| 김춘리 시인 / 소금 장갑 외 6편 (0) | 2025.12.31 |
| 조숙향 시인 / 어떤 화장터 외 6편 (0) | 2025.12.31 |
| 박이화 시인 / 새빨간 거짓말 외 7편 (0) | 2025.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