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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시인 / 시 속에서야 쉬는 시인
그는 좀체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다 월간 문예지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했으니 그는 분명 시인인데, 자장면도 먹고 싶고 바바리도 입고 싶고 유행하는 레몬색 스포츠카도 갖고 싶다 한번 시인인 그는 영원한 시인인데, 사진이 박힌 컬러 명함도 갖고 싶고 이태리풍 가죽 소파와 침대도 갖고 싶다 그러니 좀체 시 쓸 짬이 없다
그가 시를 쓸 때는 눅눅한 튀김처럼 불어 링거를 꽂고 있을 때나 껌처럼 들러붙어 있던 사람들이 더 이상 곁에 없을 때 오래 길들였던 추억이 비수를 꽂고 달아날 때 혹은 등단 동기들이 화사하게 신문지상을 누빌 때 그때뿐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때마다 절치부심 그토록 어렵사리 쓴 시들은 그러나 그 따위 시이거나 그뿐인 시이거나 그 등등의 시이거나 그저 시인 시답잖은 시들이다
늘 시 쓸 겨를이 없는 등단 십 년의 그는 몸과 마음에 병이 들었다 나가는 그 잠깐 동안만, 시를 쓴다 그가 좋아하는 나무 몇 그루를 기둥 삼아 그가 편애하는 부사 몇 개를 깎아놓고 그가 환상하는 행간 사이에 납작 엎드려 평소에는 시어 하나 생각하지 않았음을 참회하며 시 속에서야 비로소 쉰다
- 시집 〈흰 책〉 민음사
정끝별 시인 / 동태 눈알
냄비 바닥에 달랑 남은 동태머리 한 토막 아버지는 유난히 동태머리를 좋아하셨다 아가미 눈알 그리고 고니라는 이름의 내장도 남편과 아이들은 동태머리를 먹지 않는다 고니는 물론 아가미 눈알은 더더욱 남기려는데, 밀랍처럼 봉인된 저 낯익은 눈빛 내 그릇에 떠와 동태머리를 발라먹는다 쪽쪽 빨아먹는다 아버지처럼 얼음처럼 녹는 처음 살맛은 무능처럼 무르다 골육을 휘감던 수압이든 어둠이든 천만 갈래 갈라져서도 숨을 놓지 못하고 짹짹 소리를 내던 아버지의 벌린 입 속풀이에 그만이라는 주름진 아가미는 모독처럼 쓰다 파도든 해일이든 뜬눈으로 맞으며 핏줄의 피로랄까 연명의 연속이랄까 냉동과 해동을 거듭 견디다 마지막 식탁에서 이젠 안 보여야 셋째아들한테만 귀띔한 채 그리 부릅뜨고 있던 아버지의 먼눈 끝내 입에 넣을 수 없는 젓가락이 들어올린 허공을 삼킨 동공 내 혀는 아직 멀었다
정끝별 시인 / 입술을 뜯다
사랑을 할 때 나는 듣지 않았다 꿈에도 석류알처럼 군침을 머금었으니
사랑에 기다릴게 언약은 마른침처럼 얇아져
다물 때마다 가물어지는 오뉴월의 고백과 터지자마자 갈라지는 자정의 췌사 그러나
손가락은 망설임의 말꼬리에 골몰했다 손가락의 골몰은 피를 보고서야 그쳤다
오늘이 너였다면 다른 날이 나였을 텐데
엄지와 검지 끝으로 말없음표를 뜯는다 끝에 끝을 만질 때마다 뜯기는 기약들
어떤 이별을 완성하려 손을 댔을까 피를 감싼 내 연한 영혼의 맨살갗을
정끝별 시인 / 통속
서두르다를 서투르다로 읽었다 잘못 읽는 글자들이 점점 많아진다 화두를 화투로, 가늠을 가름으로, 돌입을 몰입으로, 비박을 피박으로 읽어도 문맥이 통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네살배기 딸도 그랬다 번번이 두부와 부두의 사이에서, 시치미와 시금치 사이에서 망설이다 엄마 부두 부쳐준다더니 왜 시금치를 떼는 거야 그래도 통했다 중심이 없는 나는 마흔이 넘어서도 좌회전과 우회전을, 가로와 세로를, 성골과 진골을, 콩쥐외 팥쥐를, 덤과 더머를, 델마와 루이스를 헷갈려 한다 짝패들은 죄다 한통속이다 칠순을 넘긴 엄마는 디지털을 돼지털이라고 하고 코스닥이 뭐예요?라고 묻는 광고에 사람들이 왜 웃는지 모르신다 웃는 육남매를 향해 그래 봐야 니들이 이 통속에서 나왔다 어쩔래 하시며 늘어진 배를 두드리곤 한다 칠순에 돌아가셨던 외할머니는 이모를 엄니라 부르고 밥상을 물리자마자 밥을 안 준다고 서럽게 우셨다 한밤중에 밭을 매러 가시고 몸통에서 나온 똥을 이 통 저 통에 숨기곤 하셨다
오독이 문맥에 이르러 정독과 통한다 통독이리라
정끝별 시인 / 꼬리치는 나와 까마귀는 깜깜한 밤을 헤쳐 날지
까악까악 까무러치는 캄캄한 밤에도 까마귀가 널 보든 내가 널 보지 못하든
까마귀와 나는 그 밤도 긴 폐활량이 닮았다 사무쳐 삼킨 숨을 내뱉을 때마다 터져 나는 외마디 목청이 닮았다
이름을 너무 많이 가진 밤의 얼굴이 그러하듯 내가 바라보는 곳에 내가 아니 네가 있는 건 아니다 까마귀 고기를 먹은 듯 나도 나를 아니 너를 자주 까먹곤 했으니
가짜도 거짓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짜도 진실도 아닌 까만 이야기들 속에서 보는 나와 보이는 내가 아니 네가 가장 멀다 그도 그렇듯 별이 별에게도 달이 달에게도
바닥에 눌어붙은 배를 가까스로 일으켜 세운 손가락은 열, 깃처럼 활짝 펴 까짓거 까짓거 자판 위를 내달리는 밤이면 그건 꽁질까 꼬릴까
날개는 둘, 잭나이프처럼 옆구리를 박차고 깃들을 활짝 펴 밤하늘을 가른다 나는 까마귀처럼 까마득히
손가락이나 날개를 가진 것들은 밤이면 달을 짓고 별을 털어 눈물을 떨굴 만한 만만한 어둠을 찾는다
밤이면, 사무치면 까무러치면 저마다 다른 빛과 다른 소리를 내는 법이라서 내가 내게서 가장 멀어질 때 나는 그만 까만 까마귀랑 기꺼이 가까워졌다 바깥에서
밤을 향해 꼬리치는 저만 보지 못하는 꽁지들이 있다 어두울수록 꽁지 빠지게 멀리멀리 울음을 펼친다 까마귀도 나도
정끝별 시인 / 홀가분한 홍시
집을 정리한 건 봄날이었다
짐이 되어버린 묵은 살림을 삼박사일 버리고 버리는데 물러터진 감들이 구석구석 도사리고 있었다 첫날은 식탁 밑에 다음날은 다용도실에 다다음날은 베란다에 마지막 날은 냉장고에
홍시를 만들려고 여기저기 쟁여두고 더러 잊기도 했던 것들이다 엉덩이뼈가 부서지고 기다리던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아버린 것들이다 세상 끝 울음처럼 악력을 잃고 저절로 새어 난 것들이다
그리 좋아했던 아삭 단감도 땡감 연시도 대봉감 홍시도 둥시감 곶감도
초겨울에서부터 늦봄까지 온몸에 가둬놓은 물을 여름에 반납하려는 듯 다 쏟아내고 물을 잡으려는 목마름으로
이제 끝났다, 물 한 잔만!
-계간 『신생』 2024년 봄호 발표
정끝별 시인 / 호모 에렉투스
의자를 밟고 책상을 밟고 책장꼭대기에 꽂힌 갈매기의 꿈을 손에 쥐려는 순간
폭탄처럼 날았다
두 발을 떼고 두 팔을 퍼덕이다 한발 먼저 추락한 한 발이 바닥에 깨지고서야
부서진 한 발은 종교가 되었다 성물처럼 깁스붕대로 감싸 심장보다 높이 떠받들어야 하는
엉덩이로 밀고 다니니, 먼먼 바닥 휠체어에 앉으니, 어딜 가든 섬 목발을 짚으니, 언제 가든 때아닌
바닥이 넘치고 시선이 떨어지고 속도가 멈췄다 한 발을 잠시 잃고서야
두 발이 날개였음을 발자국이 있어야 바닥을 날 수 있음을
중력에 맞서 한 뼘 남짓한 두 발바닥에 저를 세워 저를 내딛는 이 사소한 직립보행이
인간 기적의 등뼈임을 말미암아 믿겠다
-계간『시와정신』 2023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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