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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광찬 시인 / 눈사람 만들기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31.
이광찬 시인 / 눈사람 만들기

이광찬 시인 / 눈사람 만들기

 

 

팰수록 낭자해지는 어둠에 저녁이 쓰러지듯

저며 도끼날 품은 종이가 손가락을 베듯

일제히 제 아랫도리를 향해 눈 뜨는 가로등

화르르, 녹았던 눈들이 바닥을 떠받치고 있다

속이 싸한 밤의 아가리 속으로 또각또각,

매일 그런 당신에게로 엉덩방아 찧는 날들이다

모서리를 일으켜 세운 나라, 당신은

가장 둥근 곡선의 모서리를 가졌다

모서리, 당신과 내가 만나는 꼭짓점

두 개의 혀로 부시를 치면

찌르르르, 벽의 안쪽 구석에서 귀뚜라미 운다

 

 


 

 

이광찬 시인 / 가까이, 멀리

​​

3이라는 숫자 앞에 서 있네

1과 2를 앞세우고, 4와 5를 거느린 채

굽이치는 물결 위로 흘러가는 3

세 번의 기회 혹은 세 번째 기회

손오공의 머리띠를 욱 조이며 날아가는 새 한 마리

협곡, 엄마의 축 처진 젖가슴

3이라는 숫자에서 최대한 멀리 혹은 가까이

보이는 거 말고 있다고 믿니?

비유를 잃고 일렁이는 것들,

다시 물에 잠긴 몸뚱이로 3

보이지는 않지만 있다고 믿어요

2와 4 사이의 징검돌

 

-시집 『π, 명백하고 순수한 멍게들』에서

 

 


 

 

이광찬 시인 / 오디의 이분법

 

밤 지나 밤, 내겐

누구라도 들키고 싶지 않은 민낯, 알맹인

까고 까도 하염없이 우린

분분하고 까칠해서 보채기도 뒤채기도 자주

저기요, 딱 잘라 말하자 이내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

여전히 성업 중인 당신 생각을 물고 이 밤 나는 되묻습니다

희끄무레 분칠한 여자들이 자신의 얼굴을 찍어 바르느라 여념이 없는

거긴 지금 밤인가요, 낮인가요?

어디든 외곽, 불빛 새 나오는 간판 뒤

없던 일로 치죠, 뒤집으면 손등이자 쪽 거울 속

하 많은 그중 무얼 싸맨 발그레일지, 갈수록 겨울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깊고 아득해질수록 요원해지는 것들, 내겐 아침 혹은 당신

어제의 켜켜로 잘린 손가락들뿐인

오늘은 꽃 진 자리, 어느새 오디가 붉군요

 

 


 

 

이광찬 시인 / 개기일식

 1.

 여벌의 속옷과 옷가지들을 풀어놓고 쉰다, 수시로

 풍경을 바꿔 다는 액자 같은 창문과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걸터앉은 햇볕과 침실을 공유한 다음 날 아침은

 어느 연놈이 나뒹굴었는지 방안 이불이 심하게 헝클어져 있다

 2.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듯이

 온다니 당신, 찌개를 끓여놓고

 우리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비치파라솔 같은 눈동자와 미파솔라시 같은 가을 속으로

 풍덩, 조금은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구석이 있긴 하지만

 여잔 완벽해, 벌거벗은 몸은 외설이에요

 자넨 저 여인 앞의 이젤과 화가의 붓을 보지 못한 게로군

 3.

 불두덩을 물고 피어나는 한 가닥 의문처럼

 그저 멍하니 질문 하나를 꺼내 들었을 뿐인데, 바람이

 키 작은 나무의 얼마 남지 않은 이파리를 훑고 지나가네

 간신히 모낭을 삐져나온 거웃들, 제 불륜의 현장을 들킨 알몸으로 서 있네

​​

-2022년 계간 <다층> 가을호

 

 


 

 

이광찬 시인 / 냉장고에서 갓 꺼낸 수박 세 쪽

 

 

 엄마의 배는 늘 만삭, 풋내 나는 단기 4320년의 꼭지를 물고 나는 전투적으로 응애응애, 씨알도 안 먹힐 한 통의 긴 편지를 써요. 둘째, 셋째, 넷째가 순번을 기다리며 보채는 뱃속으로, 태초부터 있지도 않은 씨, 아빤 사탕발림으로 우릴 마구 뱉어냈죠. 저기 또 사고뭉치 형이 볍씨를 물고 날아올라 길 없는 갓길 위에 촘촘히 모를 내고 있네요. 그러나 여긴 도대체가 아무 일 없고요. 우린 그저 무식하고, 현실은 도무지 싱싱한 안식일 뿐.

 

- 《다시올문학》 2016년 봄

 

 


 

 

이광찬 시인 / 큐브

 

 

나를 사랑한 나머지와 내가

서로를 버리거나 벼려 하나의 몫을 구할 때

헤어짐은 온전한 나를 찾기 위한 연산법칙을 수행하죠

만나긴 쉬워도 헤어지긴 어려운 법인데, 이 둘 혹은 이들은

곧잘 만나고 헤어집니다 당신이 돌아앉아 있다면

상대는 풀었던 짐을 다시 싸기 시작할 겁니다

보세요, 천근이 만근 되어 깃털처럼 나부끼는 마법을요

교차로에선 고개를 꺾어 돌리거나 얼굴을 바꿔 달기도 하죠

수수만 가지로 분화할 수도 있어요, 아메바의 이름으로

구상은 추상이 되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평면은 입체를 덧입죠

당신이 알던 당신은 이미 당신이 아니에요, 그러니

아메바는 오늘도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맛나고 째질 테죠

그러나 내가 나였다가 내가 아니게 되는 일은 정말이지

나머지 같은 일,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 말은 흘려듣고 내 말은 과녁에 꽂히기를 바라지도 않아요

나는 그저 아메바일 뿐이고 나머지는 그냥 나머지일 뿐이니까요

나를 당신이라 부르는 당신이 있어 오늘 나는 행복합니다

잘 가요, 아메바 당신

저런 또 만났군요

나였다가 아메바였다가 당신인 나머지

나머지에서 나머지를 뺀 나머지, 그마저도

온전한 나일, 온전히 나인

 

 


 

 

이광찬 시인 / 냉장고에서 갓 꺼낸 수박 세쪽

 

 

 엄마의 배는 늘 만삭, 풋내 나는 단기 4320년의 꼭지를 물고 나는 전투적으로 응애응애, 씨알도 안 먹힐 한 통의 긴 편지를 써요, 둘째, 셋째, 넷째가 순번을 기다리며 보채는 뱃속으로, 태초부터 있지도 않은 씨, 아빤 사탕발림으로 우릴 마구 뱉어냈죠, 저기 또 사고뭉치 형이 볍씨를 물고 날아올라 길 없는 갓길 위에 촘촘히 모를 내고 있네요. 그러나 여긴 도대체가 아무일 없고요, 우린 그저 무식하고, 현실은 도무지 심심한 안식일 뿐,

 

-《다시올문학》 2016년 봄

 

 


 

이광찬 시인

2009년 계간 《서시》 신인상에 〈은하철도 999〉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2022년 전국 계간문예지 우수작품상. 현재 시산맥 시회 회원, 서시작가회 회원. <다층> 동인. 시집 『π, 명백하고 순수한 멍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