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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하늘 시인 / 나는 늘 아파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31.
김하늘 시인 / 나는 늘 아파

김하늘 시인 / 나는 늘 아파

 

 

딸기밭을 걷고 있어

​자박자박 네게로 가는 길이야

​네게선 절망적인 맛이 나는구나

​11월의 모든 날은 너를 위한 거야

​그러니 날 마음껏 다뤄 줘

​고양이처럼 내 쇄골을 핥아 주면 좋겠어

​까끌까끌한 네 형에선 핏빛이 돌겠지

​​

한번 으깨진 마음은 언제쯤 나을까

​궁금한 게 너무 많아 나는 나를 설득할 수가 없어

​그래도 네게선 딸기향이 나

​세상이 조금 더 우울해지고 있는데도

​너는 맛있고 맛있고 맛있어

​심장이 뛰어

​어느 날 내가 숨을 쉬지 못하면

​얌전한 키스를 하면 돼

​맛있겠다

​​

그런 식으로 바라보지 마

​너는 미소 짓는 법을 다시 배워야겠구나

​푸른 박쥐처럼 날고 싶어

​밤이 오면 나방 떼처럼 아무 곳이나 쏘다니겠지

​온몸에 멍이 들고, 눈물로 얼룩진 발목

​쓰다듬어 줄래?

​관자놀이 밑을, 턱 선을, 감은 눈을

​그러니 날 마음껏 다뤄 줘

​나는 늘 아파

​아파

 

 


 

 

김하늘 시인 / 고전적 잉여

 

아이스크림, 돌고래, 기도

내가 좋아하는 거야

지옥은 쓸쓸하다는데,

연한 잎처럼 새살이 돋을 때

이마에 얹힌 무능한 손과

영영 죽지 않을 속살이 있다면

순교자처럼, 오로지 네 힘으로만

걸어갈 수 있을까

여름이 끝나는 동안

원치 않는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하늘에게

나는 고백하기로 했어

서로가 서로를 몰라서 죄짓지 말자고,

단순한 섹스 스캔들이라고,

이번 생은 역시 NG에 지나지 않다는 걸

이것이 의아한 세계인 것이다

네가 있는 배경에 날 그려 놓고

꼴불견 광대처럼 얼굴에 색칠하고 웃었지

곱고 예쁘다는 얘기는 질리더라

맹세하는 게 좋아,

열정적으로 삶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어쩌라고, 난 나쁜 계집앤데

굿 걸, 이라는 소리는 좀 그만해

울지 않을 참이니까

기억이 눈을 멀게 하듯이

죽음과 상관없이

너무 우울해서 택시도 타고 동화책도 샀어

글이 사라지고, 재앙이 사라지며,

불공평했던 아름다움도 사라지는 걸까

쥐똥보다 못하던 내 삶이

조금 살만한 게 될까.

아니, 근데 아저씨 누구세요?

제 생업은 노동자고

본업은 미친년, 그게 나예요

비참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나도 마찬가지로 뿌리를 내려

늙어서 만져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시간 나며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도 좀 봐

생명이 어떤 건지,

그동안 얼마나 비천한 마음으로

싸워왔는지

그래, 너는 얼마나 겸손해졌니

사념으로 기록된 일기장은 어때

물고기처럼

숨을 참지 않아도 돼

그저 침묵할 뿐,

내내 상상되지 않는 비극이라서,

말을 하지 않을 뿐,

나는 좀처럼 정직할 수 없고

그래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구원이 필요해

이를테면,

죽어서는 몸을 벗을 수 있다는

가정(假定) 같은 것

​​

<포지션 20년 겨울호>

 

 


 

 

김하늘 시인 / Take a look

 

 

나 고양이는 집사에게 실망했다

나 고양이는 너보다 어리게 태어나서

영영 너보다 우아하게

영영 늙어갈 것이니

내 눈 속에 달이 차고 기우는데

깜빡이는 눈을 마주하지 않고

뒷동산에는 감자가 가득한데 캐지 않고

내 털이 지폐보다 귀한 줄도 모르고

투정이나 가끔 부리고

길에서 다른 고양이한테 가끔 사료나 챙겨는 주고

고양이가 다른 고양이로 잊히겠니

어느 날 내가 다녀간 후에

아무도 할퀴지 않는 밤이 여러 번 지나더라도

타인을 너무 많이는 미워 말고

장롱 밑에서 내 털을 보고 울지나 말거라

.

 


 

 

김하늘 시인 / 레쩨로의 밤

 

 

나는 지옥에서 네 이름을 쓰고 있고

너는 밤새도록 몽정을 했다

 

10시 21분에서 10시 22분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봤다

그 1초 동안 나는 평생을 산 것 같았는데

어느 날 숙변처럼 네가 빠져나가고

한동안은 인생이 엉망이 되겠지

 

레쩨로, 레쩨로

내가 잃어버린 사라진 목소리로

네게로 쫑쫑거린 노래로

레쩨로

레쩨로

리릭 레쩨로

네 감상은 착불이야

 

*

 

나는 딸기 먹는 법을 잊어버렸고

너는 사는 게 숏버스*같다고 말한다

 

못마땅한 것들을 위해 기도했다

하다못해 텔레비전 채널 2번부터 70번까지

왕복 두 번씩 돌리는 일이라도 하는 것

비관을 쥐어짤수록 휘발되는 건 무색의 언어

 

레쩨로, 레쩨로

노란색 허리띠로 목을 매고

노래를 불렀던 기억으로 노래를 부르고

레쩨로

레쩨로

리릭 레쩨로

 

나는 영영 괜찮지 못하고 네 인격은 영영 낭비였어

 

*숏버스: 존 캐머런 밋첼 감독의 2006년 작 영화.

 

계간『시작』2013년 여름호 발표

 

 


 

 

김하늘 시인 / 일회용 연애

 

 

혀를 내밀어봐

갈변한 버찌 두 알을 삼키면서

붉은 숨결을 곤두뱉고 마시고

가시덤불이 타버린 자리를 오롯이 걸어가

맨발에서 꺼지지 않는 투명한 불꽃,

 

세상의 모든 비명이 여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트램펄린 위에서 교성을 지르고

맛없는 파스타를 만들고

더러운 파스타라고 부르며

네게 화장을 해주고

계란 프라이를 뒤집다가

더러워,

더러워,

 

나쁜 단어를 다 빌려와도 소용없어

 

검은색 하이힐을 신고

사타구니 사이로 낳은 울분도

이름 없는 것이 되는 나날들

이에 파프리카 조각을 낀 채

낄낄, 아, 아무래도 좋아,

라고 스스로 무너지는 마음

 

우리 바다 보러 갈래,

 

빼앗긴 목소리로 묻는 물음에도

너는 가끔 대답할 줄 안다

내일이 없는 바다로, 바다로,

포말보다 더 짧은 0.1초를 살아

립스틱이 번지고

스타킹 올이 나가고

거꾸로 누워서 네 얼굴을 볼래

 

너는 국화꽃을 찢어발겨주면 돼

 

-계간 『시작』 2014년 가을호 발표

 

 


 

 

김하늘 시인 / ​살구눈물

 

나는 막 방금 울었는데

태어나서 처음 울어 본 기분이 들어

캐비닛 속에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오늘 꺼내 본 불어사전처럼

그렇게 낡고 낡은 눈물이 났어

괜찮아,

라고 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았어

부서진 크래커처럼,

망가진 모래성처럼,

흩어질 대로 흩어져서 가루가 된 마음으로

아직 버리지 못한 일기장 같은 건 없어

다만 조용해지는 것, 그 가느다란 고요 속에

내 심장을 두고 왔어

그래서 눈물이 나나 봐

아무런 통증도 없는

숨을 쉰다

어디선가 예쁜 손이 나타났고

그 손이 내 뺨을 감싸 쥔다

따뜻한 등에 업혀 있는 느낌이 나

먹기 좋게 식은 스프를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어

어디선가 다정한 냄새가 나고······

이제야 평온해졌어

다 망가졌는데,

삶은

살구빛이래

 

-시집 <샴토마토>에서

 

 


 

 

김하늘 시인 / ​10분 전의 나

 

 

나는 방금 10분 전의 나를 죽였어

구름이 전봇대를 지나가는 정도의 시간

불현듯 떠오르는 게 나였어

눈을 감았다 뜨면 용서할 수 없는 기분이 들어

아, 나는 폐허였구나

심호흡을 하고,

다시 나를 죽이는 연습을 해

연습이 필요하지

 

그림자가 쫓아오는 게 무서워

사라지려 할수록 사라지지 않는 검은 망토

나는 주문을 걸어,

라리아쿠비쟈이노토바이샤

라리아쿠비쟈이노토바이샤

7분 전의 내가 울고 있구나

아무도 몰라줬구나

사라졌구나

휘리릭,

그런 소리쯤 나지 않나?

 

3분 전의 내가 와서 말을 걸었지

“그만 떠나 줄래?”

 

그때 바람은 다정하게 불어 줬어

오늘을 살기에 너무 다정할 정도로

뺨을 대 보면

그 온기가 그대로 있어

그 채도가 그대로 있어

1분 전의 내가 그대로 있어

 

그럼 안녕,

하고 인사해 줬어야 했는데

 

-계간 『파란』 2016년 봄호 발표

 

 


 

김하늘 시인

1985년 대구에서 출생. 2012년 하반기《시와 반시》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샴토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