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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성 시인 / 두꺼운 책
내가 아는 소녀는 시냇물 소리를 사랑했네 여미듯 개울가에 앉아 책 읽기를 즐겼지 아직 난 또렷이 기억하고 있네 소녀가 책을 읽어야 앞 개울은 소리를 내며 흘러갔지 그 여울의 나무 그림자 아래, 그곳에서 부쳐온 소녀의 편지를 간직하고 있네 세상은 참으로 두꺼운 책이어서 함의와 귀결이 제각기 달라진다 해도 시냇물처럼 끝까지 읽어가야 해요, 간략하나 단정한 글씨가 거기 씌어 있지 세월이 아무리 흐른들 편지는 버릴 수 없어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는 날엔 벽장 속 상자를 꺼내 겉봉을 열곤 하지 그러면 갈래머리 소녀가 떠오르고 슬그머니 책갈피를 넘길 적마다 흐르던 여울물 소리가 어울려 새어 나오네 그 소리는 세상의 귀를 적시고 먼 우주 끝으로 지금도 흘러가고 있지 그러니 소녀는 여전히 개울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네 언제가 돼야 마칠지 모르는 두꺼운 책을.
-시집 『저녁의 신』에서
이학성 시인 / 물방울
검고 긴, 딱딱한 나무껍질 속을 밀며 올라갔다 저 밖에…… 숨죽인 많은 창문들이 달려 있었다
아직 나는 그곳을 넘어 들어오는 햇빛을 보지 못하였다 웅크린, 많은 날 흘러갔고 저녁마다에 나는 잠들었다
이학성 시인 / 두 대의 기타
내 다락방에 두 대의 낡은 기타가 있어 묵은 먼지를 덮어쓰고서 까맣게 잊혔다가도 소낙비라도 쏟아지려는 어둑한 오후면 한꺼번에 튕튕거리며 튜닝 소리를 내곤 하지 그런데 가만 기울이고 있으면 말야, 둘의 연주가 빗줄기를 탄복시키듯 어울리면 좋으련만 심각하게 우울했다가도 이내 환해지고 애써 달아나려다가도 왠지 돌아서고 말듯이 낡은 기타가 록 주법으로 거친 파열음을 튕기면 좀 더 낡은 기타가 세고비아처럼 부드러운 탄주를 고집하지 진즉부터 저들이 조화롭기를 바랐으나 두드러지게 강한 개성이 탈이라서 포기할까도 했는데 그렇지만 밤과 낮이 반반씩 공존해야 하듯 일과 휴식이 다른 몸이 아니듯 어느 편을 더 감싸거나 탓하진 않아, 언젠가는 불협화음을 깨고서 괜찮은 듀엣을 이루리라 아름다운 화성이 감미롭게 흘러나오리라 꿈같지만 기대를 아직 걸고는 있어서 빗소리가 잦아들 즈음 다락에 올라 현이 녹슬고 늘어지지 않도록 어루만지길 거듭하지.
-《다층》 2020. 봄호
이학성 시인 / 밤길걷는 나귀
암말과 수탕나귀의 교배에서 노새가 태어나지 수말과 암탕나귀 사이에서 나오는 건 버새 당나귀는 오로지 당나귀새끼만을 낳네 잠 안 오는 어느 밤엔 나귀科(과)의 계통도를 떠올리지 그러면 어디선가 딸깍거리는 발굽소리가 울려 히힝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오지 등짐을 얹고 가파른 등성을 넘어 마침내 그들이 닿아야 할 곳은 어디일까 아무도 못가본 끝 푸른 초원, 무수한 별똥별 떨어지는 나지막한 고원지대일까 가끔은 그 고원의 풀대 사이를 스치는 요란한 바람소리가 들려 그 바람 속을 헤치며 나귀들은 나란히 행렬을 짓네 그들은 내 잠을 실어 어디론가 아득히 나르지 검은 밤길걷는 고단한 나귀여 딸깍딸깍, 내가 끝까지 걸어가야 할 길은 과연 어디인가
이학성 시인 / 초대 통감의 십대훈령
제1령: 강압적으로 저들의 언어를 말살하기보다는 한국어의 우수성을 전파하고 널리 보급한다. 제2령: 제반 교육을 거부하거나 말썽을 일삼으며 앙심과 반기를 드는 불령인들은 본보기로 체포 구금해 지옥에 버금갈 각종 고문의 피폐를 경험케 하라. 제3령: 상시적으로 산물을 갹출하고 공출미를 거둬 기근 지진 등 재난재해를 대비해 전량 비축한다. 제4령: 영구적으로 군대와 무력은 보유하지 못하나 비상시 전투 인력과 학병을 징발하되 애국심이 강요되거나 개개인의 인권과 의지가 침해당해서도 안 된다. 제5령: 미개 국가에서나 꾸려갈 위안부 제도는 어떤 사유로도 절대 모집 하거나 철저하게 운용을 금하며, 어길 시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 톡톡히 단죄하리라. 제6령: 과거 군수물자 생산지원에 동원된 탄광 항만 병참 시설은 낱낱이 실체를 보존해 군국주의의 민낯을 알리는 산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라. 제7령: 전범의 수괴들이 합사된 신사는 해체해 더 이상 공물을 바칠 수 없게끔 하며 즉시 왕궁과 함께 개방해 녹지공원으로 조성한다. 제8령 : 평화의 상징물로 각 가정마다 원숭이를 기르도록 바나나 재배를 적극 장려하며, 아울러 관련 산업을 점충 육성시키되 고용 및 임금 복지 후생 면에서 내지인과 차등을 두지 않는다. 제9령: 반복해 역사를 잊은 민족 에게는 미래가 없음을 계도함과 동시에 모자라다 아니할 만큼의 인류애를 주입 고취시켜 나간다. 제10령: 충분한 반성의 기미와 개전의 정이 보인다고 판단될 시에야 비로소 식민 통치를 거둘 것 임을 하늘과 땅과 바다에 천명하며, 이로써 저들의 아둔함을 깨쳐 동양질서가 구현되고 만국번영 및 사해동포적 정신이 누리에 깃들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니, 모두가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과 피땀으로 쟁취된 결과임을 망각치 말라.
이학성 시인 / 침묵
그는 천천히 어깻죽지의 날개를 제거했다 그로써 갈망하던 대로 착지를 얻었다 다음으로 그는 팔과 다리를 분질러 부동을 취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기에 기어이 눈을 찔러 멀게 하고 입과 코와 귀마저 샐 틈 없이 봉해버리자 비로소 오감에 휘둘리지 않는 의지가 그를 껴안았다 그가 바란 궁극이 그것이었으니 그의 선택이 옳다 그르다 우리가 관여하거나 판별하기는 적절치도 않거니와 이젠 그가 자유로이 허공을 떠돌던 영혼임을 알지 못한다 단지 그가 오래된 신비로운 언어를 마침내 터득했음을 감지할 따름이어서 제대로 알아들을 이가 고작 몇몇일까마는 지나가며 바위에 쫑긋 귀를 댔다가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다.
-『경향신문/詩想과 세상』 2023.04.17
이학성 시인 / 바닥의 헌법학
비좁은 서가 탓에 책들도 편치가 않다 절기가 바뀌거나 할 때, 과단히 솎아져 버려지는 비극적 운명을 맞는다. 감별의 기준은 그때마다 갈린다. 고가의 두툼한 책이더라도 잔류의 희망을 노래하긴 이르다. 그릇된 검열로 몇 권의 아름다운 고전들이 안타깝게 내버려지곤 했으나 그것은 어리석은 실수를 만회하는 교훈이 되기에 족했다. 얼마 전 막내의 방에서 퇴출된 헌법학개론, 일주일째 마루를 구르다 언니가 가져가 노트북 받침대로 삼았다. 실용은 창의를 낳고 작으나마 변화를 이끄는 힘, 이후 쓰임새가 다한 그것을 내가 목침으로 활용했으나 그마저도 질리자 식구 중 키 작은 이가 식탁 밑으로 옮겨와 요긴한 디딤판으로 만들었다. 마침내 바닥에 깔린 헌법 모름지기 법이란 군림의 자리가 아니라 밑바닥 민의를 섬겨야 하지 않는가. 전혀 의심할 바 없으리라 여겨 단호히 주창한다. 다소나마 책의 존엄성을 훼손한 것에 자괴감이 일곤 하나 우리 가정이야말로 법의 가치를 실제 구현한 최초의 식구들이 되었노라.
-《주변인과 문학》 2019.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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