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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마종기 시인 / 마흔두 개의 초록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31.
마종기 시인 / 마흔두 개의 초록

마종기 시인 / 마흔두 개의 초록

 

 

초여름 오전 호남선 열차를 타고

창밖으로 마흔두 개의 초록을 만난다

둥근 초록 단단한 초록 퍼져 있는 초록 사이

얼굴 작은 초록 초록 아닌 것 같은 초록

머리 헹구는 초록과 껴안는 초록이 두루 엉겨

왁자한 햇살의 장터가 축제로 이어지고

젊은 초록은 늙은 초록을 부축하며 나온다

그리운 내 강산에서 온 힘을 모아 통정하는

햇살 아래 모든 몸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물 마시고도 다스려지지 않는 목마름까지

초록으로 색을 보인다. 흥청거리는 더위

 

열차가 어느 역에서 잠시 머무는 사이

바깥이 궁금한 양파가 흙을 헤치고 나와

갈색 머리를 반 이상 지상에 올려놓고

다디단 초록의 색깔을 취하도록 마시고 있다

정신 나간 양파는 제가 꽃인 줄 아는 모양이지.

이번 주일을 골라 친척이 될 수밖에 없었던

마흔두 개의 사연이 시끄러운 합창이 된다.

무겁기만 한 내 혼도 잠시 내려놓는다

한참 부풀어오른 땅이 눈이 부셔 옷을 벗는다

정읍까지는 몇 정거장이나 더 남은 것일까

 

-시집 <마흔두 개의 초록> 문학과 지성사, 2015

 

 


 

 

마종기 시인 / 꽃밭에서

 

 

이제부터 나는

짧게 살겠다.

밤사이 거센 비바람 속에

휘어지고 눕혀진 굴종.

난초꽃가지나 풀꽃 쑥부쟁이,

누가 말해준 것일까

한낮이 되기도 전에

꼿꼿이 다시 일어서는 힘.

길도 잘 모르는 힘의 밑동이

모든 것 안고 또 감싸 안고

뜰을 뒤지며 따뜻해지네.

 

 


 

 

마종기 시인 / 동생을 위한 弔詩

-외국에서 변을 당한 壎에게

 

 

1. 入棺式

 

어릴 때는 고등학교까지 같은 이불을 덮고

대학에 가서는 작은 아랫방을 나누어 쓰고

장가든 다음에는 외국에까지 나를 따라와

여기 같은 동네 바로 뒷길에 살던

내 동생 졸지에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하느님.

동생이고 친구고 내 의지처였습니다.

싸움 한번도, 목소리 한번도 높이지 않은

들풀처럼 싱글거리며 착하게 살던 내 단짝,

하느님, 당신밖에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눈물이 자꾸 납니다.

관을 덮고 나면 내일 하늘이 열리고

내일 지나면 이 땅에서 지워질 이름,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귀염둥이 내 자식이라고 받아주세요.

 

-시집 <이슬의 눈>에서

 

 


 

 

마종기 시인 / 박꽃

 

 

그날 밤은 보름달이었다.

건넛집 지붕에는 흰 박꽃이

수없이 펼쳐져 피어 있었다.

한밤의 달빛이 푸른 아우라로

박꽃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ㅡ박꽃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네.

아버지 방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한마디,

얼마나 또 오래 딴생각을 하며

박꽃을 보고 꽃의 나머지 이야기를 들었을까.

-이제 들어가 자려무나.

-네, 아버지.

문득 돌아본 아버지는 눈물을 닦고 계셨다.

 

오래 잊었던 그 밤이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내 아이들은 박꽃이 무엇인지 한번 보지도 못하고

하나씩 나이 차서 집을 떠났고

그분의 눈물은 이제 가슴에 절절이 다가와

떨어져 있는 것이 하나 외롭지 않고

내게는 귀하게만 여겨지네.

 

 


 

 

마종기 시인 / 깨꽃

 

 

 헤어져 살던 깨알들이 땅에 묻혀 자면서 향긋한 깻잎을 만들어내고, 많은 깻잎 속에 언제작 고 예쁜 흰 깨꽃을 안개같이 뽀얗게 피워놓고, 그 깨꽃 다 보기도 전에 녹녹한 깨알을 한 움큼 씩 만들어 달아주는 땅이여. 깨씨가 무슨 흠정을 했기에 당신은 이렇게 농밀하고 풍성한 몸 을 주는가.

 

 그런가 하면, 흐려지는 내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꽃씨가 어떻게 이 뒤뜰에 눈빛 환해지는 붉은 꽃, 보라색 꽃의 연하고 가는 피부를 만드는가. 땅의 염료 공장은 어디쯤에 있고 봉제 공 장은 어디쯤에 있고 향료 공장은 또 어디쯤에 있기에, 흰 바탕에 분홍 띠 엷게두른 이 작은 꽃 이 피어 여기서 웃고 있는가.

 

 나이 들수록 남들이 다 당연하다며 지나치는 일들이 내게는 점점 더 당연하지 않게 보이는 것 은 내 분별력이 흐려져 가기 때문인가. 아무려나, 흐려져 가는 분별력 위에 선 신비한 땅이 여, 우리가 언제 당신 옆에 가면 그때부터는 당신의 알뜰한 솜씨는 다 알아볼 수있겠는가. 흙 이 꽃이 되고 흙이 깨가 되는 그 흥겨운 요술을 매일 보며 즐길 수 있겠는가.

 

 늘어만 가던 궁금증이 하나씩 해결되는 깨알 같은 눈뜸이여, 나는 오늘도 깨꽃 앞에 앉아아른 거리는 그 말을 기다리느니, 어느 날 내 몸도 깨꽃이 되면 당신은 내 말과 글이 드디어 향기 를 가지게 된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찾아 헤매던 날들은 지나고 드디어 신선한 목숨이 된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마종기 시인 / 연가

 

 

이제 江물은 흐르지 않는다.

때로 江물을 막아서면

소리치며 未練으로 흐르던 물결,

向方을 알지 못한 채

나는 사랑했다.

記憶하라 江물의 對話,

江물의 視野, 그 은근한 힘을.

 

이제 江물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지 않는 江은 마침내 마르고

江물은 스스로 목숨을 놓고

땅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江은 자취를 감추고

江길을 따라 傾斜地가 남으면

周圍의 몇 사람이 길을 가면서

잠깐 동안 목마름을 느낄 것이다.

상상했던 사랑을, 그 싱싱한 인연을.

 

그래도 언젠가는 모두 잊을 것이다.

이곳에 江이 있었던가

이곳에 江이 있었던가

그러나 잠깐 경사지를 바라보라.

아직 사랑할 수 있는 江의 이름을

빛나던 강물 소리를 들을 것이다.

 

 


 

 

마종기 시인 /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봄밤에 혼자 낮은 산에 올라

넓은 하늘을 올려보는 시간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별들의 뜨거운 눈물을 볼 일이다.

상식과 가식과 수식으로 가득 한

내 일상의 남루한 옷을 벗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 밤,

별들의 애잔한 미소를 볼 일이다.

 

땅이 벌써 어두운 빗장을 닫아걸어

몇 개의 세상이 더 가깝게 보이고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 느린 춤을 추는

별 밭의 노래를 듣는 침묵의 몸,

멀리 있는 줄만 알았던 당신,

맨발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 신약 빌립비서 2장 12절

 

-시집 <새들은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문학과지성, 2002)

 

 


 

마종기(馬鍾基) 시인

1939년 일본 동경에서 출생. 연세대 의대 및 서울대 대학원 졸업. 의사. 월간 『현대문학』 1959년 1월호에 박두진의 추천으로 발표 이후 3회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 『조용한 개선(凱旋)』 『두번째 겨울』 『변경(邊境)의 꽃』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나라 하늘빛』 『이슬의 눈』 등. 공동 시집 『평균율』Ⅰ·Ⅱ.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