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종기 시인 / 마흔두 개의 초록
초여름 오전 호남선 열차를 타고 창밖으로 마흔두 개의 초록을 만난다 둥근 초록 단단한 초록 퍼져 있는 초록 사이 얼굴 작은 초록 초록 아닌 것 같은 초록 머리 헹구는 초록과 껴안는 초록이 두루 엉겨 왁자한 햇살의 장터가 축제로 이어지고 젊은 초록은 늙은 초록을 부축하며 나온다 그리운 내 강산에서 온 힘을 모아 통정하는 햇살 아래 모든 몸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물 마시고도 다스려지지 않는 목마름까지 초록으로 색을 보인다. 흥청거리는 더위
열차가 어느 역에서 잠시 머무는 사이 바깥이 궁금한 양파가 흙을 헤치고 나와 갈색 머리를 반 이상 지상에 올려놓고 다디단 초록의 색깔을 취하도록 마시고 있다 정신 나간 양파는 제가 꽃인 줄 아는 모양이지. 이번 주일을 골라 친척이 될 수밖에 없었던 마흔두 개의 사연이 시끄러운 합창이 된다. 무겁기만 한 내 혼도 잠시 내려놓는다 한참 부풀어오른 땅이 눈이 부셔 옷을 벗는다 정읍까지는 몇 정거장이나 더 남은 것일까
-시집 <마흔두 개의 초록> 문학과 지성사, 2015
마종기 시인 / 꽃밭에서
이제부터 나는 짧게 살겠다. 밤사이 거센 비바람 속에 휘어지고 눕혀진 굴종. 난초꽃가지나 풀꽃 쑥부쟁이, 누가 말해준 것일까 한낮이 되기도 전에 꼿꼿이 다시 일어서는 힘. 길도 잘 모르는 힘의 밑동이 모든 것 안고 또 감싸 안고 뜰을 뒤지며 따뜻해지네.
마종기 시인 / 동생을 위한 弔詩 -외국에서 변을 당한 壎에게
1. 入棺式
어릴 때는 고등학교까지 같은 이불을 덮고 대학에 가서는 작은 아랫방을 나누어 쓰고 장가든 다음에는 외국에까지 나를 따라와 여기 같은 동네 바로 뒷길에 살던 내 동생 졸지에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하느님. 동생이고 친구고 내 의지처였습니다. 싸움 한번도, 목소리 한번도 높이지 않은 들풀처럼 싱글거리며 착하게 살던 내 단짝, 하느님, 당신밖에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눈물이 자꾸 납니다. 관을 덮고 나면 내일 하늘이 열리고 내일 지나면 이 땅에서 지워질 이름,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귀염둥이 내 자식이라고 받아주세요.
-시집 <이슬의 눈>에서
마종기 시인 / 박꽃
그날 밤은 보름달이었다. 건넛집 지붕에는 흰 박꽃이 수없이 펼쳐져 피어 있었다. 한밤의 달빛이 푸른 아우라로 박꽃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ㅡ박꽃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네. 아버지 방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한마디, 얼마나 또 오래 딴생각을 하며 박꽃을 보고 꽃의 나머지 이야기를 들었을까. -이제 들어가 자려무나. -네, 아버지. 문득 돌아본 아버지는 눈물을 닦고 계셨다.
오래 잊었던 그 밤이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내 아이들은 박꽃이 무엇인지 한번 보지도 못하고 하나씩 나이 차서 집을 떠났고 그분의 눈물은 이제 가슴에 절절이 다가와 떨어져 있는 것이 하나 외롭지 않고 내게는 귀하게만 여겨지네.
마종기 시인 / 깨꽃
헤어져 살던 깨알들이 땅에 묻혀 자면서 향긋한 깻잎을 만들어내고, 많은 깻잎 속에 언제작 고 예쁜 흰 깨꽃을 안개같이 뽀얗게 피워놓고, 그 깨꽃 다 보기도 전에 녹녹한 깨알을 한 움큼 씩 만들어 달아주는 땅이여. 깨씨가 무슨 흠정을 했기에 당신은 이렇게 농밀하고 풍성한 몸 을 주는가.
그런가 하면, 흐려지는 내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꽃씨가 어떻게 이 뒤뜰에 눈빛 환해지는 붉은 꽃, 보라색 꽃의 연하고 가는 피부를 만드는가. 땅의 염료 공장은 어디쯤에 있고 봉제 공 장은 어디쯤에 있고 향료 공장은 또 어디쯤에 있기에, 흰 바탕에 분홍 띠 엷게두른 이 작은 꽃 이 피어 여기서 웃고 있는가.
나이 들수록 남들이 다 당연하다며 지나치는 일들이 내게는 점점 더 당연하지 않게 보이는 것 은 내 분별력이 흐려져 가기 때문인가. 아무려나, 흐려져 가는 분별력 위에 선 신비한 땅이 여, 우리가 언제 당신 옆에 가면 그때부터는 당신의 알뜰한 솜씨는 다 알아볼 수있겠는가. 흙 이 꽃이 되고 흙이 깨가 되는 그 흥겨운 요술을 매일 보며 즐길 수 있겠는가.
늘어만 가던 궁금증이 하나씩 해결되는 깨알 같은 눈뜸이여, 나는 오늘도 깨꽃 앞에 앉아아른 거리는 그 말을 기다리느니, 어느 날 내 몸도 깨꽃이 되면 당신은 내 말과 글이 드디어 향기 를 가지게 된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찾아 헤매던 날들은 지나고 드디어 신선한 목숨이 된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마종기 시인 / 연가
이제 江물은 흐르지 않는다. 때로 江물을 막아서면 소리치며 未練으로 흐르던 물결, 向方을 알지 못한 채 나는 사랑했다. 記憶하라 江물의 對話, 江물의 視野, 그 은근한 힘을.
이제 江물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지 않는 江은 마침내 마르고 江물은 스스로 목숨을 놓고 땅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江은 자취를 감추고 江길을 따라 傾斜地가 남으면 周圍의 몇 사람이 길을 가면서 잠깐 동안 목마름을 느낄 것이다. 상상했던 사랑을, 그 싱싱한 인연을.
그래도 언젠가는 모두 잊을 것이다. 이곳에 江이 있었던가 이곳에 江이 있었던가 그러나 잠깐 경사지를 바라보라. 아직 사랑할 수 있는 江의 이름을 빛나던 강물 소리를 들을 것이다.
마종기 시인 /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봄밤에 혼자 낮은 산에 올라 넓은 하늘을 올려보는 시간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별들의 뜨거운 눈물을 볼 일이다. 상식과 가식과 수식으로 가득 한 내 일상의 남루한 옷을 벗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 밤, 별들의 애잔한 미소를 볼 일이다.
땅이 벌써 어두운 빗장을 닫아걸어 몇 개의 세상이 더 가깝게 보이고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 느린 춤을 추는 별 밭의 노래를 듣는 침묵의 몸, 멀리 있는 줄만 알았던 당신, 맨발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 신약 빌립비서 2장 12절
-시집 <새들은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문학과지성, 2002)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성춘 시인 / 연옥煉獄, 봄 외 6편 (0) | 2026.01.01 |
|---|---|
| 신정민 시인 / 거룩한 밤 외 6편 (0) | 2025.12.31 |
| 김하늘 시인 / 나는 늘 아파 외 6편 (0) | 2025.12.31 |
| 이학성 시인 / 두꺼운 책 외 6편 (0) | 2025.12.31 |
| 이광찬 시인 / 눈사람 만들기 외 6편 (0) | 2025.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