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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춘 시인 / 연옥煉獄, 봄
너덜너덜 고물 된 몸 아침마다 한 주먹씩 알약 삼킵니다 아니 독毒약 삼킵니다 5월, 부신 햇빛 속 룰루랄라 산길을 가는데 아뿔싸, 똥이 마렵습니다 산허리에 쪼그려 염치불구 쌉니다 산제비 한 마리 무심한 척, 못 본 척 지나갑니다
망가진 봄 망가지고 있는 지구 생의 그늘은 갈수록 깊어지고 갈수록 봄날은 봄날이 아닙니다 똥물 흘리는,
―《시와사상》, 2019년 가을호
김성춘 시인 / 각시 붓꽃
고사리 새순 돌돌 말아 올리는
4월도 하순,
경주 남산 열암곡 마애불 가다 만난
숨겨 논 情婦 같은 너!
호젓한 산길에
숨은 듯 나도 피어서
오오래
너를 읽는다.
김성춘 시인 / 천국보다 낯선. 1
어머니는 영도 아래 시장에서 김치를 팔았다 해질 무렵이면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셨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흰 구름을 자주 바라보시던 어머니 어머니는 어느 날 흰 구름이 되셨다 어머니와 함께 나는 가까운 경주에도 못 갔다 그런데 오늘은 참 멀리 왔다 손녀와 아들 손잡고 태평양 건너 고비사막 지나 남프랑스 해변까지 정처 없는 흰 구름 방으로 흘러 왔다 칸 해변에서 손녀와 물장구 친다. 새끼 오리 마냥 깔깔거리며 모래성을 쌓고 또 쌓는다 오리 새끼들 같은 옷 벗은 나무들 찰랑대는 햇빛 속에서 사랑의 샘물 퍼 올리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길 잃은 흰 구름 같다 어머니 손을 잃은 정처 없이 혼자 너무 멀리 온
* 천국보다 낯선':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이름
김성춘 시인 / 라틴어 수업
혹,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 기억나세요? 카르페 디엠! -오늘에 집중하고 현재에 살라 키팅 선생께서 첫 시간, 제자들에게 온몸으로 가르치던 말 그리고 또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향기 나는 선사의 설법 같은 도 우트 데스! -네가 주니까 내가 준다 이 말 속엔 머리에서 가슴까지 사랑이 내려가는데 무려 70년이나 걸렸다는 김수환 추기경의 뭉클한 말씀도 비치는데요 숨마 쿰 라우데! -최 우등
선사의 법어 같은 시냇물 소리 새 소리 귀 기울이면 낙엽 밟는 소리도 가만히 들리는 오랜 내 친구 같은 오오 청청한 영혼의 빛이여. *카르페 디엠 carpe diem 오늘에 집중하고 현재에 살라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도 우트 데스 do ut des 네가 주니까 내가 준다 *숨마 쿰 라우데 summa cum laude 최고의 우등
김성춘 시인 / 바하를 들으며
안경알을 닦으며 바하를 듣는다
나무들의 귀가 겨울 쪽으로 굽어있다 우리들의 슬픔이 닿지 않는 곳 하늘의 빈 터에서 눈이 내린다 눈은 내리어 죽은 가지마다 촛불을 달고 있다 성 마태 수난곡의 일악구(一樂句) 만리밖에서 종소리가 일어선다 나무들의 귀가 갈아앉는다 금세기의 평화처럼 눈은 내려서 나무들의 귀를 적시고 이웃집 그대의 쉰 목소리도 적신다 불빛 사이로 단화음이 잠들고 누군가 죽어서 지하층계를 내려가고 있다
김성춘 시인 / 역
내가 사는 경주엔 오래된 역이 있다 바람 부는 날 나는 가끔 역 대합실로 가서 배낭을 메고 어디론가 총총히 떠나는 사람들을 바라보길 좋아한다
역엔 언제나 진눈깨비가 뿌리고 바람 불고 비가와도 만남과 이별은 밤낮없이 출렁거린다
당신은 그날 차창 밖으로 손수건 흔들며 뜨거운 목소리로 말했지 마리아 만큼 당신을 시링한다고 잊지 못한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
오늘, 단풍잎 같은 사람들 단풍잎 같은 추억을 만들며 침묵 속으로 얼굴을 감춘다
잊혀 지지 않는 추억 하나
시그널처럼 걸려 있다 세상의 모든 역은 추억에 뼈가 시리다
-한국시인협회 사화집 《역驛》 2021년
김성춘 시인 /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귀
한국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피아노 조율사 K에게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평생을 피아노 조율을 해오면서 훌륭한 연주가들을 많이 만났을 텐데, 그중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조율사 K가 말했습니다 아, 생각나요, 피아니스트 손열음 씨도 아니고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도 아니고 지휘자 정명훈 선생도 아니었어요 오랜 시간을 내가 초 집중해서 조율을 마쳤을 때 유치원에서 막 돌아온 그 집 피아노의 꼬마 주인공 여섯 살짜리 유치원생 말을 잊지 못해요 잘 조율된 피아노 건반 하나를 손가락으로 띵! 쳐보더니 "똑같네"라고 꼬마는 말했어요 아, 나에겐 너무나 충격적인 그 말 한다미 "똑같네" 나는 어린 귀 앞에 할 말을 잃었지요 -<시에> 202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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