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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현호 시인 / 오래된 취미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
이현호 시인 / 오래된 취미

이현호 시인 / 오래된 취미

 

 

기지개를 켠다

창밖 길 건너 장례식장은 불이 꺼졌다

몸이 추처럼 무거운 건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울음

소리가

젖은 신문지처럼 꿈에 들러붙었기 때문

흙갈이를 해줘야지 생각한 지 서너 해가 되었는데

밤새 화분 위로 낯모르는 색이 피었다

전화를 걸어야지 했는데 주전자 물 끓는 소리에

그만 어제인 듯 잊었다

“한 발은 무덤에 두고 다른 한 발은 춤추면서 아직 이렇게 걷고 있다네.”*

검은 나비들이 쏟아져나온다, 미뤄뒀던 책을 펼치자

창을 넘지 못하는 나비들, 그 검은

하품을 할 때, 느른한 음색 속에 등걸잠 같은 생이 다 들었다

나는 살고 있고, 내가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삶을 취미로 한 지 오래되었다

 

*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시간의 목소리』에서.

 

 


 

 

이현호 시인 / 배교

 

 

 혼자 있는 집을, 왜 나는 빈집이라고 부릅니까

 

 흰 접시의 외식(外食)도 흠집 난 소반 위의 컵라면도 뱃속에 들어서는 같은 눈빛입니다

 

 "죽기 살기로 살았더니 이만큼 살게 됐어요." 혼자 있을 때 켜는 텔레비전은 무엇을 위로합니까

 이만큼 살아서 죽어버린 것들은

 

 변기 안쪽이 붉게 물듭니다, 뜨겁던 컵라면의 속내도 벌겋게 젖었습니다

 

 겨울은 겨울로 살기 위해 빈집으로 온기를 피해 왔지만, 커튼을 젖히자 날벌레같이 달려드는 햇빛들

 사랑을 믿기 때문에 사랑했을까, 삶을 사랑해서 살아가고 있을까

 

 밥을 안치려고

 손등은 쌀뜨물 안에서 뿌옇게 흐려진다

 네가 없는 집을, 나는 왜 빈집이라고 불렀을까

 

 


 

 

이현호 시인 / 안녕하세요, 당신의 고독은

 

 

 시인 카몽이스는 촛불이 꺼졌을 때 키우던 고양이의 눈빛으로 계속 시를 썼다 그렇게 어감이 아름다운 곳으로 날아가고 싶은 항하사의 저녁 우리가 검은 단어들로 수의를 짓고 있는 이곳은 낯익지 않을 오지의 시간 그대의 고양이는 두루마리처럼 몸을 말고 자고 있는지

 

 여기가 꽃자리라면 몇 잔의 마유주를 들이켜고 이생의 별자리를 방랑하는 동안 끼적거린 몇 쪽의 구겨진 낭만을 걸망에서 꺼낼 일 독백도 방백도 아닌 춤을 추는 마음속의 사구(砂丘)며 입안에 서걱대는 미망의 이름이며 영원의 음(音)인 고독은 다섯번째 계절에 미뤄둔 채

 

 우리들 모두는 여기 출신이지만 우리들 모두는 다른 별에서 왔다는 것도 잊고 검은 수의를 걸친 채 드럼통에 젖은 악보를 던져넣으며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어감으로 서로를 불러보네 어둠 속을 너울대는 한 편의 촛불 같은 너를 저 멀리서 오는 고향 별빛 아래 고양이같이 옹송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손가락이 고독으로 길어져버렸다는 데 밤을 세워 부정했지만

 

 


 

 

이현호 시인 / 비포장도로

 

 

닿을 듯 말 듯 걷고 있었지

악수보다는 가깝고 농담보다는 조금 떨어져서

 

이봐 거기 조심해, 뒤를 돌아보니

길을 가득 채운 거대한 짐마차가 달려오고

 

한 사람은 진창에 한 사람은 덤불에 발이 빠졌지

어는 쪽이든 더럽고 아픈 것은 나였기를 바라며

 

요즘 같은 세상에 짐마차라니

우리는 웃었지, 사실 나는 나의 표정을 볼 수 없지만

 

풀독 오른 발목 긁으며 흙 묻은 운동화 털다가

비포장도로라니, 어쩌다 우리는 여기까지 왔을까

 

다음에 짐마차가 달려오면 덥석

너를 내 품에 들렀다 가게 해야겠다

화락 몸을 날려 네 위를 다녀가야겠다

이봐 거기 위험해,

 

뒤를 돌아봤을 땐

모든 것이 모든 겉이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지,

저것 봐 이렇게 좋은 길에서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들 이상하지 않니

요즘 세상답다

 

우리는 포장도로를 농담처럼 맨발로 걷고 있었지

지저분한 발을 보고 누구고 악수를 건네지 않는지

이상하지, 악수는 발로 하는 게 아닌데

 

짐마차는 무엇을 위한 인간의 기교일까

웃었지, 어느 쪽이든 아마 그랬을 거야

 

 


 

 

이현호 시인 / 음악은 당신을 듣다가 우는 일이 잦았다

 

 

창밖을 나서지 못하는 음악과 동거하다 보면 문득

당신이 입술에 와 앉는다

 

몸속을 휘젓고 떠나간 음(音)과 귓속을 맴도는 음 사이

고산병을 앓는 밤

 

음악은 당신을 발명한다

어느 교인(敎人)들이 불태운 관(棺)을 강물에 띄워 보내는 장례를 치르듯

어떤 심장박동을 빌리지 않고는 날려 보내지 못할 말이 있다

 

이루어진 소원은 더는 소원이 아닌 것처럼

곁에 없는 사람만을 우리는 영원히 사랑할 수 있듯이

 

한 이름을 흥얼거리다 보면 다 지나가는 이 새벽

당신의 이름을 길게 발음하면 세상의 모든 음악이 된다

 

기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기도가 닿지 않기를 바라고

우리는 음악을 울린다

 

 


 

 

이현호 시인 / 응답

밤의 산책길에서 너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하다

네 안에서 컹컹거리는 할 말을 산책시키느라 밤을 걷는 사람 같다

 

나는 네가 하려는 말에 목줄이 채워진 사람

발을 디디는 데마다 네 그림자가 있다

 

벌써 몇 바퀴째 돌고 도는 우리의 산책은 언제 끝날까

침묵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다물고 있던 입이 마침내 벌어지려 할 때

너는 나를 돌아본다, 그거

 

아니?

몰라.

 

몰라?

아니.

 

모른다고도 안다고도 할 수 없는 이야기

모르지는 않지만 알고 싶지는 않은 말

 

우두커니 멈춰 선다 나는

네 그림자가 발밑을 빠져나간다, 저기

 

응?

아니야.

 

아니야?

응.

 

밤의 산책길에서 나는 할 말이 있다 이제

안에서 끙끙거리는 할 말을 풀어놓으려고 어둠을 걷는다

 

밤이 긴 것일까 산책이 긴 것일까

벌써 몇 바퀴째

그림자가 발걸음을 산책시킨다

산책이 우리를 끌고 간다

-월간 『문학사상』 2024년 1월호 발표

​​​​

 


 

 

이현호 시인 / 있다

 

 

 웅그리는 사람이 있다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조금씩 제자리를 비우고 있다 허공에게 더 많은 옆을 내어주고 있다

 

 정오의 눈사람같이

 강물에 모서리를 씻는 자갈처럼

 

 웅크리는 사람이 있다 머리와 두 팔과 두 다리가 다섯 손가락처럼 얇아지고 있다

 

 이파리를 털어내고 말라가는 겨울나무 같이

 한바탕 비를 쏟고 작아지는 먹구름처럼

 

 옴츠러드는 사람이 있다 혼잣말을 하며 쉼표인 듯 마침표인 듯 점점 응등그러지는 사람이 있다

 

 마침내 한 방울 물기마저 사라져버리고

 머물던 자리를 다 내어주고

 

 허공이 되어버린 사람이 있다 우리가 우리를 그러안을 때 품 속엔 그 사람이 있는 듯하다

 

 여기에 또 그 자리에 당신이 있다

 

 


 

 

이현호 시인 / 안녕하세요, 당신의 고독은

 

 

 시인 카몽이스는 촛불이 꺼졌을 때 키우던 고양이의 눈빛으로 계속 시를 썼다 그렇게 어감이 아름다운 곳으로 날아가고 싶은 항하사의 저녁 우리가 검은 단어들로 수의를 짓고 있는 이곳은 낯익지 않을 오지의 시간 그대의 고양이는 두루마리처럼 몸을 말고 자고 있는지

 

 여기가 꽃자리라면 몇 잔의 마유주를 들이켜고 이생의 별자리를 방랑하는 동안 끼적거린 몇 쪽의 구겨진 낭만을 걸망에서 꺼낼 일 독백도 방백도 아닌 춤을 추는 마음속의 사구(砂丘)며 입안에 서걱대는 미망의 이름이며 영원의 음(音)인 고독은 다섯번째 계절에 미뤄둔 채

 

 우리들 모두는 여기 출신이지만 우리들 모두는 다른 별에서 왔다는 것도 잊고 검은 수의를 걸친 채 드럼통에 젖은 악보를 던져넣으며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어감으로 서로를 불러보네 어둠 속을 너울대는 한 편의 촛불 같은 너를 저 멀리서 오는 고향 별빛 아래 고양이같이 옹송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손가락이 고독으로 길어져버렸다는 데 밤을 세워 부정했지만

 

 


 

이현호 시인

1983년 충남 전의 출생. 추계예술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 2007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라이터 좀 빌립시다>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 <비물질>. 산문집 『방밖에 없는 사람, 방 밖에 없는 사람』. 제2회 시인동네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