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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영 시인(해남) / 세월 연습
논두렁 풋콩이 가을 하늘을 끌어내려 수잉기(穗孕期) 배부른 벼포기 다독인다.
어깨너머 귓전으로 들리는 논병아리 짝짓는 소리 야릇하여 물꼬 낮추는 농부의 삽질이 외로 흔들린다. 선선하게 살찌는 바람 붙잡고 익어가는 저 풍요로운 열매들 물굽이 환한 가을강에 새 생명을 들어 올리고,
고향 파란 잔등에 핀 갯메꽃 청청한 향기 기억하게 낮게 몸을 숙인다. 바람은 순수하게 불어와 가슴 출렁이게 하고 산새들의 울음이 이슬처럼 매달리는 산아래 초가집, 허허로운 마당엔 앉은뱅이 풀꽃이 한 개의 목숨으로 세월을 연습하는 초가을, 바라볼수록 낯익은 산천경개가 사뭇 의젓하다.
박종영 시인(해남) / 가로등 연가
밤의 열기로 일어서는 어둠의 빛 늦은 귀가를 염려하는 빛의 은혜로움, 외진 곳 허름한 집을 찾아가는 무거운 발걸음과 휘황한 궁전으로 향하는 가벼운 으스댐과 모두가 그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툭툭 빛의 몸뚱이를 발로 차며 돌아가는 사람들, 그때마다 못명한 빛은 눈물처럼 흩어지고 미명의 시간, 노동의 새벽을 지고 가는 사람이거나 술 취한 타락의 건달이거나 날렵한 도적의 무게 없는 발걸음까지도 낱낱이 기억하며 눈감아주는 저, 메마른 가슴으로 피워내는 빛의 길, 오직 한곳에 머물러 연인처럼, 어두운 세상의 눈이 되어주는 푸른 등대 같은 것.
박종영 시인(해남) / 새벽의 노래
내 우울함이 정녕 어느 누구에게 전해진다 해도 그 쓸쓸함은 남아 누누이 위안의 힘이 되는 것이므로,
나는, 어둠의 길이 환해질 때까지 달빛 기우는 새벽으로 서 있어야 한다.
박종영 시인(해남) / 눈의 연가(戀歌)
하루종일 눈이 내린다 어지러운 마음잡고 보니 고독이 홀로 서성인다
바다도 건너고 산도 넘고 다시 황량한 들판을 달려와 가슴으로 파고드는 하얀 얼굴
눈빛을 들어 살며시 안기는 눈꽃의 이름을 외우고 싶다 함박눈, 싸락눈, 진눈깨비 얼룩진 이별의 눈물에 빈 가슴을 적신다
언제까지 이렇듯, 미동하며 눈 오는 날을 혼자 지키는가
그리움이 멈추는 날은 바람에 실려가며 보채는 눈이나 될까.
박종영 시인(해남) / 입추 절기
쌀풀 먹여 뻣뻣한 한산모시 단속곳 밑으로 드나드는 소슬바람 신명나는 웃음기에 삼복더위 저절로 물러서는 어설픈 오후
겨드랑이 속살 보일 듯 말 듯 땀 절은 모시 적삼 파고드는 신선한 가을바람 냄새
박종영 시인(해남) / 유월의 들꽃
낮은 산허리 감고 밋밋하게 떠도는 안개 사슬 푸른빛 밟고 가는 산천마다 풀국새 뭉개진 울음이 쑥 빛으로 물들고
발둑 가 애기 똥풀이 아장아장 걸어 나오면 더운 바람에 길 내어주고 비켜선 민들레 가벼운 웃음
그제야 등 시린 추억 등에 업고 그리움 밀어 올리는 유월의 들꽃.
박종영 시인(해남) / 청초한 신맛
매실나무 꽃 진 후 아흐레쯤 지나 솜털 보송보송한 어린 씨방, 철없는 3월의 봄 심술부린 눈발로 오돌오돌 추위 탄 어린 열매, 그런 속도 모르고 선묘 옆 묵밭에 외로움 달래려 심은 청매실 열 그루, 오늘, 낯설게 찾아가 두 눈 부릅뜨고 살펴보아도 예년 같이 콩알보다 더 컸을 열매 보이지 않는다 찬찬히 살피니 가지 뒤에 숨어 두려운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씨방 몽구리던 날 된 눈 맞아 눈시울 얼었으니 몸을 사리는 것이다 안쓰러워 몇 개 안 열린 어린것들 만지려니 웬걸, 날 가시가 콕콕 달려든다 이게 자식 키우는 어미의 본능인가? 손아귀로 가슬한 밑동에 힘을 주니 그제야 경계를 풀고 대견스레 안기는 풋풋한 웃음, 빙그르르 입안에 고이는 청초한 신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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