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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명길 시인 / 적송 숲에 누워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
최명길 시인 / 적송 숲에 누워

최명길 시인 / 적송 숲에 누워

 

 

적송 숲에 누워

아름드리 적송 숲에 누웠다.

야간 산행 중에

솔가지 일렁거리는 사이로 산별들 많다.

그 건너가 무등등계인가

애총에서 나온 해골 같은 별이, 별 때문에

솔잎에 광채가 서려 있다.

수만 개의 은못 뭉치가

일시에 날아들어가 박힌 밤 하늘 천장

솔가지 사이 그 흔적,

 

간간히 딱, 하고

나무삭다리가 부러졌다.

 

-(월간문학 2008년 12월호)

 

 


 

 

최명길 시인 / 첫 말문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은

단풍이 붉었다.

천진* 소나무 숲을 지나서야

그녀가 첫 말문을 열었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나에게 들려준 첫 말 한마디

아무것도 몰라요.

청간천 다리를 건너

호롱불빛 내다보는 초가 앞까지

그녀를 바래다주며

두어 번 옷깃이나 스쳤을까

초가을 달빛이 갈댓잎에 부딪혔다가

싸락싸락 떨어지고

그때마다 여울 물살은 아프게 울었다.

동해가 그 아래서 으르렁대고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천진 : 천진은 이쁜 마을이었다. 이 마을을 중심으로 남녘으로는 순채 순 가득한 천진 호수가 맑고 북녘에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청간정이 다락처럼 놓여 있다.

 

​-『내외일보/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2023.10.16.

 

 


 

 

최명길 시인 / 빛으로 오는 사람

 

 

그 사람 빛으로 오네.

눈부시게는 아니고

저녁놀처럼 그윽히

어스름 조금 못 다가간

그런 빛으로 오네.

침묵으로 타버린 몸

잠시 얼굴 드러내다 돌아서는

안타까운 빛으로 비치네.

샘물에 그늘로 어려 있듯 가늘히

어느 누구의 한 생이 고스란히 담겨서

다만 조금만 보여 주는 그런 빛으로

그 사람 빛으로 풀리네.

개울물살 물아지랑이를 밟으며

잠시 날개를 내려놓다 미끄러져 떠오르는

갯버들 실잠자리 그 위에 넘쳐 날듯 닿아서

닿아서 고이는 그런 눈물겨운 몸으로

그런 아롱거림으로 오네.

 

 


 

 

최명길 시인 / 하늘 장례

 

내가 죽으면 나없는 나를

하늘에 사는 새들에게 나누어 주리라

제일 배고픈 새들에게

 

고해의 나날들을 끌고다닌 육신이다

어디 단맛이야 있을까 마는

저들이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하라

마음이 살다간 빈집을 누가알아

새들이 배불리 먹고 날개 힘 솟구쳐

밤하늘 별밭까지 날아갈지

 

 


 

 

최명길 시인 / 안나푸르나와 마주 앉아

 

 

저 날카로운 칼능선에 나를 걸쳤다.

나는 펄럭대는 누더기

갈기갈기 찢어지고 흩어져서야 그 뭐랄까

찰찰무진법계의 흰 너울 물결과 한몸을 이루었다.

찢어지고 흩뿌려져서야 마침내 한 몸을 이룬 이 몸은

이 몸이 아니다. 나가 아니다.

하늘이 점지한 몸 아니라 안나푸르나가 합일한

또 다른 뭐다. 안나푸르나 몸이다.

서서히가 아니라 몰록 하는 순간

나는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 분명히

나는 무수한 겁을 돌고 돌아 나온

'나'가 아니라 안나푸르나 상봉의 그 묵조가 낳은

색다른 '나'로, 나의 그 무엇이었다.

안나푸르나는 안나푸르나 나는 나인

그 차고도 비릿한 흰빛 덩어리와 마주친

나,

산이 뿜어대는 숨결의 태동이었다.

 

 


 

 

최명길 시인 / 화접사

 

 

나는 나비가 되오리

그대는 꽃이 오시라

내가 벼랑을 날아

그대에게 다가가오리

 

알 수 없는 그대 비밀 엿들으러

내 속 마음삐끔 내어 보이고

如是因如是果 ...

 

이렇게 읊조리면

그대 닫힌 입술 조금만

벙글러 주오시라

 

첫새벽 바다와 하늘

빙긋 열리듯이

그렇게 벙글러 주오시라

 

한 즈믄해 지난

다음쯤에야

그대가 나비 되오시라

나는 꽃이 되오리

 

 


 

 

최명길 시인 / 걸어서 우주 속으로

 

 

새는 허공 속으로 날아서 가고

나는 걸어서 우주 속으로 들어간다.

마음은 광활한 우주

터럭 한 잎 걸머메고

나는 내 마음 속으로 들어간다.

 

 


 

최명길 시인 (1940~2014)

1940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59년 강릉사범학교 졸업. 1989년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1975년 《현대문학》에 시〈자연서경〉 〈해역에 서서〉 〈음악〉 등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 『화접사』『풀피리 하나만으로』 『반만 울리는 피리』 『은자, 물을 건너다』 『콧구멍 없는 소』 『하늘 불탱』. 명상시집 『바람속의 작은 집』. 홍조근정훈장, 강원도문화상<문학부문> 수상. 2014년 5월 별세.(향년 7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