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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희 시인 / 잘 지낸다는 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는가 잘 지낸다는 말
저무는 해가 가득 담긴 잘 지낸다는 말
혼자 먹는 밥에 적막 한 줌 새싹 한 줌 고추장 한 줌 넣어 쓰윽 쓱 비벼 먹었다는 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는 너의 잘 지낸다는 말
안개 낀 차창처럼 뿌옇게 잘 보이지 않는 잘 지낸다는 말
둥글게 둥글게 잘 지낸다는 말
홍수희 시인 / 꽃무릇
가을이 그리움이 아쉬움이 안타까움이 피었네 조금만 더 잘해줄 걸 조금만 더 속삭여줄 걸 조금만 더 곁에 있어줄 걸 화선지 위에 이제 마악 번져나는 한 방울 톡, 떨어진 빠알간 수채 물감처럼 꽃무릇이 피었네 톡!
-<카페 '홍수희 시인의 하이얀 세상>
홍수희 시인 / 위로 받고 싶은 맘
가을걷이 끝난 휑한 들판에 어깨와 어깨를 비비며 서 있었다 위로 받고 싶은 맘 다 안다고 니 등 내 등 서로 토닥이며 서 있었다 위로 받고 싶은 맘 내게 있다면, 내가 먼저 너를 위로하리라 갈대꽃 하얗게 속삭이며 서 있었다 웬수야, 너도 이리와 봐라 사랑은 이런 거다 니도 와서 니 슬픔을 비벼보아라 갈대꽃 눈雪빛 스크럼을 짜고 있었다
홍수희 시인 / 생일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바로 오늘 태어난 사랑스런 이여! 밤하늘의 별처럼 많고 많은 사람 중에도 당신은 오직 한 사람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봐요
꽃들도 저마다 하나이듯이 한낮의 태양도 하나이듯이 당신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오직 한 사람이란 걸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기적인가요
당신은 축복 받아 마땅한 사람! 온 세상을 당신께 드립니다 산과 바다 이 기쁨 모두 당신께 드립니다
홍수희 시인 / 차 한잔을 위하여
나는 너를 위하여 내 하루의 작은 시간을 떼어놓겠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비밀한 오두막을 지어 놓겠다
나의 하루가 비록 나를 내다놓은 삶이라 해도
때로는 거짓 웃음과 억지의 쳇바퀴를 구르는 삶이라 해도
원피스가 먼저 세수를 하고 거울이 나를 치어다보며 권태가 지하철을 탄다 하여도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도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단 하나의 눈을 위하여
노을이 지면 찻물을 끓여야겠다 이제 마주앉을 너를 위하여 차를 마시는 시간, 나는 한없이 자유롭다
거기에는 철학도 없다 거기에는 편견도 없다 거기에는 너의 느낌뿐이다
홍수희 시인 / 친구
오랜 침묵을 건너고도 항상 그 자리에 있네
친구라는 이름 앞엔 도무지 세월이 흐르지 않아 세월이 부끄러워 제 얼굴을 붉히고 숨어 버리지 나이를 먹고도 제 나이 먹은 줄을 모른다네
항상 조잘댈 준비가 되어 있지 체면도 위선도 필요가 없어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웃을 수 있지 애정이 있으되 묶어 놓을 이유가 없네 사랑하되 질투할 이유도 없네
다만 바라거니 어디에서건 너의 삶에 충실하기를
마음 허전할 때에 벗이 있음을 기억하기를 신은 우리에게 고귀한 선물을 주셨네 우정의 나뭇가지에 깃든 날갯짓 아름다운 새를 주셨네.
홍수희 시인 / 그늘 만들기
8월의 땡볕 아래에 서면 내가 가진 그늘이 너무 작았네
손바닥 하나로 하늘 가리고 애써 이글대는 태양을 보면 홀로 선 내 그림자 너무 작았네
벗이여, 이리 오세요 홀로 선 채 이 세상 슬픔이 지워지나요
나뭇잎과 나뭇잎이 손잡고 한여름 감미로운 그늘을 만들어 가듯 우리도 손깍지를 끼워봅시다
네 근심이 나의 근심이 되고 네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
벗이여, 우리도 서로의 그늘 아래 쉬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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