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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혜정 시인 / 상대성 이론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
신혜정 시인 / 상대성 이론

신혜정 시인 / 상대성 이론

 

 

나는 점점 작아진다

제철이 된 오늘의 옷은 점점 커지고

나는 점점 얇아진다

투명해져서 장기가 드러나 보일 정도다

어제 내가 입었던 것은 철 지난 옷

계절이 사라진 것을 이제 알았다

관절 마디가 뚝뚝, 소리를 내듯

오래된 것들이 소란스럽다

살아 있는 것들

그것은 어제 있었던 일

새로운 계절이 열리고

모든 지나간 달력이 말을 건다

그것은 오늘의 일

귀를 쫑긋하고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들어보라

내일의 관절이 똑똑

문을 두드리는 것을

 

 


 

 

신혜정 시인 / 연가(戀歌)

 

 

만약 낙원이 존재한다면

그곳은 나무가 울창한 숲이겠습니다

서로가 뿌리째 연결되어 있는 그곳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태양이 대지를 덥히고

생의 뿌리 깊은 맛을 알몸으로 느끼는

그 시간을 나는

기적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세월을 견뎌온 나무의 기적을

그저 느끼며 살아도

행복하겠습니다

서양 최초의 사람이 따 먹었다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실과가 있다면

나는 제일 먼저 따서

그대에게 건네겠습니다

달고 쓰고 시큼한

진리의 맛을 느낄 수 있다면

영원을 맹세해도 좋습니다

신령한 나무 아래서

오래도록 그대와 나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 하며

그 실과를 먹겠습니다

그곳은 모든 세상의 말들이 사라지고 고요히

바람 부는 소리만 들릴 것입니다

 

 


 

 

신혜정 시인 / 외로운 엄마들은 교회에 간다

 

 

 엄마들은 제 상처에 스스로 반창고를 붙이지 못한다 아프면 시름시름 앓다 일어선다 한겨울 시린 갈증에 달콤한 귤 한 봉지 선뜻, 사지 못한다 아이들은 자라고 로맨스는 이미 너무 멀고, 늘어진 남편의 런닝구 추슬러 입고 새벽 댓바람 교회에 간다 이방의 신 야훼는 엄마들을 어루만져 주신다 옷 한 벌, 과일 한 봉지, 새 속옷, 파마 한 번 어치의 욕망을 차곡차곡 모아 제물로 바친다 넙죽넙죽 잘 드시는 이방의 신 엄마들의 얼굴은 사랑받는 여자의 욕망으로 넘쳐나 우리 아이 학업, 우리 남편 사업 잘 되게, 해, 주시옵 시, 고....

 야매로 일만 원짜리 파마를 하고 촌스런 머리와 독한 파마약 냄새를 받아주시는 야훼 앞에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야훼는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며 부자들의 배를 채워주시는 풍요의 신들을 귀 있는 자에게만 들려주시는 은밀한 신 엄마들의 처진 마음을 탱탱하게 하시는 오르가즘의 신!

 오늘도 엄마들은 붉은 루즈 칠하고 교회에 간다.

 

 


 

 

신혜정 시인 / 평화의 눈 1

 

 

살상무기를 제조하는 자들이

평화를 이야기하는 이상한 시대

용산 미군기지 안을 보면 이해가 간다

그곳은 평화의 눈

모든 평화의 중심에 핀 꽃

이국의 개들이 사람과 산책을 즐기고

중성화 수술을 마친 고양이들이 한가롭게

창가의 볕을 즐기는 곳

사람들에겐 주님의 평화가 임재하는 곳

 

 


 

 

신혜정 시인 / 낮은 자의 경전

-승냥이의 시간*

 

 

우주는 한번도 별을 흘린 적이 없지만 우리는

오래전 죽은 별들이 눈앞으로 쏟아지는 것을 보네

그것은 어쩌면 몇 억 광년 전 우주가 쏟아 낸 눈물

곧 무너질 위태 속에서 밝게 빛나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어지러워도 늘 반듯한 사각이어야 성립되는 큐브처럼

질서는 무질서 속을 위태롭게 건넌다

치열하게 영원의 시간을 약속하며 별들은

뜨겁게 빛나고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네

봄꽃보다 분주한 시간을 보내느라

여름이 어미 지났음을 나중에 깨닫게 된 어느 해

별이 흐르는 자리마다 계절이 바뀐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시리고, 이가 빠져나간 듯 자꾸만 혀로 확인하게 되는 것

우주는 한 번도 별을 흘린 적 없지만

앞으로 당도할 계절에 죽은 이의 사연처럼 우리는

미치도록 쏟아지는 별을 보네

 

* 승냥이는 현재 멸종 위기에 있다.

 

-《시와표현》 2018. 7월호

 

 


 

 

신혜정 시인 / 花洞

 

 

꽃 피는 동네 화동에서 그대와 나 비틀거린다 누가 내 사랑에 술을 탔나 꽃향기에 취했나 웃음도 꽃 피고 사랑도 꽃 피는 시절 만개한 벚꽃처럼 온 존재가 나, 흔들린다 화동에서. 동해의 하얀 모래밭에 두고 온 발자국 바다에 씻겨 여기 서울까지 오셨나 그대의 숨결에 묻어 온 갯비린내, 꽃 피우다 만 시절, 열정의 한 끝자락, 추억의 뒤안길.......

모래알 섞는 소리 철썩철썩 꽃비가 되어 내리는 화동에서 나, 흔들린다 대책 없이. 밤이 낮으로 바뀌는 그 전율어린 기적' 날마다 꽃 피는 기적의 순간 앞에 사랑에 서툴고 고통에 익숙했던 시간 무저갱으로 흩날리며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고요가 되어 내리는 그대와 나 아, 꽃피는 화동에서

 

-헬렌 켈러 에세이 「사홀만 볼 수 있다면」에서

 

 


 

 

신혜정 시인 / 블랙홀은 털이 없다

 

 

어제 입은 바지처럼

조금씩 낡아갑니다

늘어난 스타킹에 몸을 끼우듯

다시 어제를 입습니다

눅눅한 빨래가

줄 위에서 어깨를 떨굽니다

영화를 계속해서 돌려봅니다

장면을 외우고

대사를 외우고

삭제된 장면을 외웁니다

창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안단테에서 알레그레토로 변하는

순식간의 함성

배란일에 하는 섹스처럼 아슬하게 목에 걸린

나의 어제를 입습니다

어제의 무릎이

나를 꼭 닮아 있습니다

 

-<시인동네> 2015 겨울호

 

 


 

신혜정 시인

1978년 인천 출생.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스프링 위를 달리는 말>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라면의 정치학』 『여전히 음악처럼 흐르는』. 산문집 『왜 아무도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나』 『흐드러지다』 등. 역서 『시크한 그녀들의 사진 촬영 테크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