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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해림 시인 / 겨울산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
강해림 시인 / 겨울산

강해림 시인 / 겨울산

 

 

 바위와 바위 사이, 풋내나는 날개마다 노오란 풀씨 듬뿍 묻히고 봄은 득음(得音)을 위하여 침묵하는 물소리마다 우리들 가슴 마른 풀잎마다 불을 지르고, 정말 저 산등성이 너머 와! 소릴 지르며 함성처럼 몰려오고 있는 것일까요

 

 첩첩산중 불려간 몇천년 전 바람소리 듣는 늙은 소나무는 해가 동에서 서으로 식은 꼬리를 부끄러이 감추었다간 다시 서서히 타오르듯, 길 잃고 헤매이던 숲속의 친구들마다 어김없이 돌아와 다 함께 타오를 그 날의 기인 봄날을 예감하지만

 

 발 아래 꽁꽁 얼어붙은 어둠, 적멸 속에서 무수한 열망과 푸른 빛들 엉킨 소리의 불꽃을 안으로 안으로만 뜨겁게 묻으며 돌아앉아 이듬해 봄날, 마침내 죽음도 해탈도 한 줌 산비알 붉은 햇살 아래 불러내는 저 산마음 닿을 때까지 얼마나 오래 바람부는 산행을 해야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강해림 시인 / 갈대

 

 

 

얼굴 가득 경련을 일으키며, 파문이 일 때마다 잡풀더미 움켜쥔 江心을 읽으며 오래토록 서 있었습니다 세상은 왜 저 산과 바다 경계를 세우고 흐르는 강물처럼 한 방향으로만 가라 강요하는지 단 한 번도 스스로 중심잡지 못한 허리춤 사이 서걱거리며 모래알이 빠져나갑니다

 

 이름지울 수 없는 서러운 세상 꿈꾸다 버림받은 영혼의 척박한 땅, 마음은 언제나 추락지점 모르는 수십 미터 상공까지 날아오르고 싶었습니다

 

 어느새 어둠이 킬킬대며 무릴 지어 내려와 내 영혼의 발등에 입맞춤합니다 빛과 어둠이 서로 몸을 섞고 탐한들 어찌 흉내나 내겠습니까 어둠 속 더듬거리며 뻗어가던 나의 뿌리가 너덜거릴수록 비로소 인간의 울음을 흉내낼 수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바람결에 소식 한 장 보냅니다 휘휘 빠져나가는 휘파람 소리 하나로 세상은 온전한 슬픔에 젖고 기억 속에서 만일 내 불온한 뿌리가 닿을 어둠이 없었다면 어찌 이 팍팍한 생 건널 수나 있었겠습니까

 

 잠 없는 것들 서로의 체온만으로도 따뜻한 밤입니다 서러운 출생을 꿈꾸며 마음은 다시금 고단한 뿌리를 내리고 떠나지 못한 새들 위하여 비워둔 가슴, 누군가 또 아프게 둥지를 트나 봅니다

 

 


 

 

강해림 시인 / 내 상처의 분홍 환부가 침식삭박하거나

융기한 거기

 

 

내 상처의 분홍 환부가 침식삭박하거나

융기한 거기

내 몸 속에 동굴이 자란다

비틀어도 잠가지지 않는 물방울들이

지층을 뚫고

퐁퐁 솟아나는 내면은 어둡고 다습하다

알락꼽등이·등줄굴노래기·장님굴새우·박쥐·유령거미가 산다

 

가끔 밥 달라고 칭얼대거나

비명을 질러댈 때마다

몸이 아프다

늑골 근처가 시큰거리고 궁금해진다

 

그것들은 내 상처를 먹고 자란다

비좁다고 투덜대거나

목마르다고 보채지 않도록

나는 자주 아프고 상처받아야 했다

 

내 상처의 분홍 환부가 침식삭박 하거나 융기한 거기

돌꽃 만발한

추억의 정거장이 있다

 

한밤중에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

 

어느새 동굴이 날 삼켜 버렸다

 

 


 

 

강해림 시인 / 고해

 

 

껍질이 벗겨지고

펄펄 끓는 잿물에 던져졌다가는 햇볕에 몸 말리는 호사도 잠시,

나무방망이로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는

고해가 없었더라면

 

몸이 내지르는 소리며, 받아 적지 못한

달빛 멜로디도

문자 이전의

구비전승하는 것들과 함께 흥얼흥얼 부르다 말 콧노래로 사라져갔을 텐데

 

백지로

그러니까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리지 않은 채로

 

백지 수표 한장으로

세상과

맞장뜨는

 

너는 천의 얼굴

 

지폐, 성냥갑, 러브레타, 바게트 상자, 영화 포스터, 책갈피, 납입고지서......... 염습 때 고이고이 싸서 마지막 온기 나눠 주던

너는 한없이 가볍고 잘 찢어지지만

 

베이면

선혈이 돋고

 

달빛, 섬섬옥수에 침 묻혀

구멍을 뚫어

훔쳐보는

 

아흔아홉 번 힘든 공정을 거치고, 마지막 한 번 쓰임을 거치면 백번이라

백지(白紙)라 한다는데

 

세상에서 가장죄 없고

무구한 길,

너는

 

-계간 《시》 2022년 봄호, '신작특집'에서

 

 


 

 

강해림 시인 / 신방에 들다

 

 

콧구멍 속으로

쥐새끼도 아닌 것이 들어와 박박 긁어대더니

두개골까지 구멍을 뚫고 뇌수까지 몽땅 꺼내 갔다

머릿속이 텅 비었다

 

이번에는 옆구리에 구멍을 내고

간이며 내장들을 꺼내 갔다

심장만 달랑 남겨 두고

 

종려나무 술로 몸속 구석구석 은밀한 곳까지 씻겨지고

방부제가 뿌려지고

막소금으로 꼭꼭 채워진 채 건어물처럼 말라간다

 

둘둘 붕대가 감긴다

 

죽은 심장이 뛰고

홍등을 켜놓은 듯

환한 주검*이

주검을 불러 후끈 달아올랐다

 

신방(神房)에 들었다

 

*주검: 미라

 

 


 

 

강해림 시인 / 금기

 

 

내가 버린 인형들이 날 찾아왔어요

그 목각인형도

 

악몽을 꾸다 깨어났는데 여전히 꿈속이었어요

죽어도, 죽어도 나는 살아났죠

 

한 많은 것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요

무자귀, 달걀귀신, 몽달귀신, 목없는귀신, 물귀신,

구미호, 어둑시니, 두억시니......

그중에서도 달걀귀신이 제일 무섭죠

얼굴 없는

 

잠은 깊을수록

물귀신 같고

 

죽은 자에게 말을 거는 순간 악령의 저주가 시작된다는데

들은 것을 말하지 말고

본 것을 기억하지도 말라는데

 

텔레비전 앞에서 꿈에 나타날까 봐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전설의 고향'을 보는 거나

무덤을 파헤쳐서라도

보고 싶고 알고 싶은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인데요

 

달 속엔 정말 옥토끼가 살고 있는지

사슴 발자국 같은

천부경 여든한 자는 왜 입속에서만 맴도는지

 

신령스러운 말씀 같은

달빛 아래

귀신과 입맞춤을 했어요

 

 

 


 

 

강해림 시인 / 슬픈 연대

 

 

창 없이 방패만 들고 있으라니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눈만 마주쳐도 화살처럼 이것이 들어와 고열이 나고 눈이

멀어버리지 재난 문자처럼 찾아온 봄, 너도

 

어제는 서로 사랑했는데, 우린 슬픈 공범자야 찍찍, 쥐새끼처럼

울어도 소용없는 밤의 염증이며 부스럼이야 마마 자국이야

 

역귀가 들면 부적을 붙이든가 굿이나 하지

복숭아나무 가지로 죽도록 후려 치든지

 

축축하고 따뜻한 입술이, 입술에 닿지 않도록*

 

너를 복사하고 삭제하기를 거듭하는 동안 감염된,

병고나 죽음도 운수소관

 

죽은 자는 산 자의 밥상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느라 허기가 지고,

산 것이든 죽은 것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데도.

이놈의 염병할

 

아무것도 만지지 말고 누구도 만나지 말라는데

 

막이를 찾아 텅 빈 거리로 출몰하는 짐승들처럼 어디든

가고 싶은데, 기차는 8시에 떠나는데

 

아파도 아프지 않은, 슬픈 연대는

 

*카뮈의 『페스트』에서 인용.

 

 


 

강해림 시인

1954년 대구 출생. 한양대 국문과 수료. 1991년 계간 『민족과 문학』, 1997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 시집 『구름 사원』(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선정), 『환한 폐가』 『그냥 한번 불러보는』 『슬픈 연대』 등. 2012년 <대구문학상>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