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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종섶 시인 / 시의 집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
이종섶 시인 / 시의 집

이종섶 시인 / 시의 집

 

 

신작시는 꾸준히 쓰는데

청탁은 거의 없는 나이 든 무명 시인

 

죽고나면 미발표 시들을 묶어

유고시집이라도 낼 수 있을까

 

집도 없이 떠돌다 사라져갈 시들이

지금도 이름 모를 시인의 품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따뜻한 집에서 한번

보란듯이 살아보고 싶어 하는 살붙이들

 

가난한 시인이 많은 시대

유고시집도 아무나 낼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노시인의 눈망울에

애절한 시 한 편 흐른다

 

살아서 집을 얻지 못한 시들은

죽어서도 얻지 못하는 것일까

 

아무리 일해도

집 한채 구하기 어려운 세상

 

시인의 눈물은 잉크보다 진하다

 

 


 

 

이종섶 시인 / 김장

 

 

 한 세상 잘 살았다며,

 

 허리를 묶은 채 속살을 통통하게 찌웠던 가을배추가 긴 겨울잠에 들어가기 위해 털갈이를 하는 계절입니다 살갗에서 떨어져 나온 거친 피륙은 살아있는 동안 뿌리를 내렸던 터전에 누워 차가운 쪽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희고 노란 속살이 부끄러운 듯 빳빳한 몸뚱어리는 동짓날 대문처럼 붉은 염료를 뒤집어쓰며 제 삶의 안쪽으로 추억을 끌어 모아 베개를 삼습니다 남루한 것들을 미련 없이 벗어던진 자만이 정갈한 육신 하나 얻을 수 있는 법, 곱게 늙으라며 향료 한 줌 발라주고 봉숭아 꽃물도 들여 주고 꽃 보자기도 씌워줍니다 파묻어둔 옹관 속으로 들어가 잠이 든 김장김치의 숨소리가 포근한 밤,

 

 쉿!

 

 기나긴 동면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7인 시집, <시에 체하다>, 문학의전당, 2007)

 

 


 

 

이종섶 시인 / 바람의 식사법

 

 

바람은 흔들리는 것들만 먹고 산다

흔들리지 않으면 죽은 것이라는 감별법에 따라

무엇을 만나든 먼저 흔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끼니때마다 바람의 식탁을 차려야하는 나무는

잎사귀의 흔들림까지 바쳐야 하는 삶이 괴로워

바람도 불지 않고 흔들림도 없는 어두운 땅속에서

어린뿌리들의 두 손을 꼭 잡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떠나라고 재촉한다

가느다란 가지 하나 바람결에 흔들리기라도 하면

탈출계획을 들켜버린 듯 화들짝 놀라는 나무

아무 일 없다는 표정을 간신히 지을 수 있지만

땅속에서는 시커먼 흙을 움켜쥔 뿌리들이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서럽게 울고 있다

입맛을 더욱 돋궈주는 그 소리는

나무하나 붙잡고 통째로 뜯어먹는 바람의 양념

뼈만 앙상한 나무에 다시 푸른 살이 오를 때까지

기나긴 허기를 달래줄 맑고 차가운 독을 품는다

뾰족한 잎사귀나 딱딱한 잔가지들까지

모조리 핥아먹어버리는 바람의 습성 앞에

발이 묶여있는 나무들이 벌벌 떤다

바람은 흔들림을 먹고 사는 짐승

흰 이빨에 맹독을 키우며 나무를 사육한다

바람의 아가리에 물리면 약도 없어

봄가을로 빨갛게 부어올랐다 가라앉는 자국들

푸른멍이나 이빨자국을 남기며 아문다

 

 


 

 

이종섶 시인 / 눈물

 

 

 어린 연어가 먼 바다로 떠나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물짓는 어미, 그 물이 1급수인 것은 어미가 흘린 눈물 때문이다

 

 새끼들이 동해를 지나 태평양을 건너 알래스카까지 갔다가 목숨을 걸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은 어미의 눈물이 그리워서다

 

ㅡ 『시인시대』 (2022, 여름호)

 

 


 

 

이종섶 시인 / 두 세계의 자기장에 끌리는 그 시인

 

 

 두 개의 영역에서 갈등하고 있는 한 시인이 있다. 그의 시는 두 영역이 서로 밀고 당기는 경계에 있다. 어떤 때는 한쪽 영역으로 쏠리다가 또 어떤 때는 다른 쪽 영역으로 쏠리기를 반복하면서 시를 쓰고 있다.

 

 어느 한쪽으로 가버릴까, 어느 한쪽에 정착할까 싶은 궁리가, 아니 솔직한 생각 또는 진취적인 의지가 작동할 때마다 한쪽에서 다른 쪽을, 다른 쪽에서 또 다른 한쪽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오래 머물기도 한다. 그래도 딱히 어떤 결론이 나지 않는다. 어떤 결론을 낼 수도 없다. 그 시인에겐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용기? 시에서 용기란 앞서가는 것일 수도 있고 섣부른 치기에서 나오는 만용일 수도 있는 것. 그래서 결국 재주와 실력을, 시대와 타인과의 관계를 종횡으로 형성하는 재주와 실력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는 재주와 실력을 탓하거나, 아쉬운 마음으로 겸허히 인정해보기도 한다.

 

 전통적인 서정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 보고 싶으나 그 세계의 질감을 구축하는 것이 힘든 탓인지 자주 물리는 느낌이다. 그럴 때도 서정시의 한계가 아닌 서정을 구현하는 솜씨의 부족을 절감할 뿐이다. 동시에 새로움의 갈망에 대한 근본적인 욕구가 작용하는 덕분이기도 하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시를 넘어 모든 예술의 기본적인 바탕이자 자세일 터, 그 시인에게도 새로움을 향한 정신과 욕망이 마그마처럼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새로움을 창의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의 그림자 때문인지, 그마저도 제대로 보란 듯이 앞세우지도 못하고 있다.

 

 그 시인은 어쩌다 그런 자세를 가지게 되었을까. 아마도 근복적으로는 자신의 시 쓰기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에서 나온 ‘패턴의 반복’ 내지는 ‘서정의 반복’에 대한 물림 현상이었을 것이다. 또한 새로운 영역의 시 쓰기를 향한 발걸음에 자신이 없거나 주위에서 그런 시도에 대해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의식을 스스로 하게 되거나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시인은 갈팡질팡하면서 엉거주춤한 자세에 길들여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인이 자신의 시 쓰기를 포기할 것 같지는 않다. 서정에 대한 본성은 근본적인 바탕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숨을 쉬듯 푸른 하늘에 시를 적을 것 같고, 새로움에 대한 갈망 또한 그의 정신에 깊이 새겨져 있는 욕구 자체여서 의지와 의욕이 그 시인의 생애가 다하는 내내 꿈틀거리며 움직일 것 같다.

 

 대중과의 거리 두기를 하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시를 쓸 것인지, 아니면 대중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따른 무력감의 안개에 휩싸여 적당히 살아가면서 시를 쓸 것인지, 아니면 ‘대중은 없다’는 초지일관의 생각으로 아예 하고 싶은 대로 나름의 생각에 따른 시를 쓸 것인지, 도무지 그 속마음을 알 수가 없는 그 시인.

 

 그 시인은 자주 갈팡질팡한다. 그 시인의 자세는 늘 엉거주춤이다. 그런 그 시인을 보는 주변의 시선이 어떨지 궁금해하는 그 시인은 오늘도 두 세계의 자기장에 끌리며 좌충우돌한다. 오락가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대를 탓하고 시선을 탓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자신의 능력이 없고 재능이 부족함을 절감할 뿐이다.

 

 그 시인을 만나면 가끔 드러내는 그의 속내를 들을 수 있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 세계의 질감과 그 속에 들어있는 결이 같은 시인들의 흐름이나 출현이 있다면 자신도 힘을 낼 수 있을 텐데 하는... 그런 말을 나지막이 들려주고 돌아가는 그 시인의 뒷모습.

 

 자세히 보니 비틀거리지도 않고 방향도 없이 가는 길도 아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기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을 향해 단정하면서고 고요하게 가는 모습이다. 그 시인의 등이 따뜻하게 보이기는 처음이다.

 

-시인수첩 2023 여름호

 

 


 

 

이종섶 시인 / 빙어

 

 

일조량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그해 겨울

앞이 보이지 않아 견디기 힘들었다

희미한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날은

온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야 겨우 살 수 있었다

뼈까지 녹아버리지 않을까 걱정이었지만

한 조각 햇살이라도 들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폭설까지 내려 얼음장을 뒤덮으면

하늘은 백태가 끼어 뿌옇기만 했다

햇빛부족현상은 호수를 온통 뒤흔들어

모든 기억을 남김없이 게워내도록 사주했으나

머릿속까지 말끔하게 비워낸 물고기들은

몸이 보이지 않아도 문제될 게 없었다

햇빛이 미치도록 그리워 죽고 싶을 때쯤

두개골을 때리는 맹렬한 굉음과 함께

커다랗게 뚫려버린 하늘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사이사이 끼어있는 미끼를 허겁지겁 빼먹는 동안

운 좋은 놈들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가

꿈에 그리던 빛의 세계로 떠날 수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출구를 기웃거리며

지긋지긋한 백야를 어서 탈출하고 싶었는데

느닷없이 찾아와버린 잔물결 이는 계절

탈옥을 꿈꿀 수 없는 감옥에서

수중낙원이라고 말하는 천국에서

다시 겨울을 기다리는

작은 물고기들의 눈은 한없이 맑았으나

머리는 텅 비어 있었다

 

 


 

 

이종섶 시인 / 두 세계의 자기장에 끌리는 그 시인

 

 

 두 개의 영역에서 갈등하고 있는 한 시인이 있다. 그의 시는 두 영역이 서로 밀고 당기는 경계에 있다. 어떤 때는 한쪽 영역으로 쏠리다가 또 어떤 때는 다른 쪽 영역으로 쏠리기를 반복하면서 시를 쓰고 있다.

 

 어느 한쪽으로 가버릴까, 어느 한쪽에 정착할까 싶은 궁리가, 아니 솔직한 생각 또는 진취적인 의지가 작동 할 때마다 한쪽에서 다른 쪽을, 다른 쪽에서 또 다른 한쪽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오래 머물기도 한다. 그래도 딱히 어떤 결론이 나지 않는다. 어떤 결론을 낼 수도 없다. 그 시인에겐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용기? 시에서 용기란 앞서가는 것일 수도 있고 섣부른 치기에서 나오는 만용일 수도 있는 것. 그래서 결국 재주와 실력을, 시대와 타인과의 관계를 종횡으로 형성하는 재주와 실력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시 세계를 구축 하는 재주와 실력을 탓하거나, 아쉬운 마음으로 겸허히 인정해보기도 한다.

 

 전통적인 서정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 보고 싶으나 그 세계의 질감을 구축하는 것이 힘든 탓인지 자주 물리는 느낌이다. 그럴 때도 서정시의 한계가 아닌 서정을 구현하는 솜씨의 부족을 절감할 뿐이다. 동시에 새로움의 갈망에 대한 근본적인 욕구가 작용하는 덕분이기도 하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시를 넘어 모든 예술의 기본적인 바탕이자 자세일 터, 그 시인에게도 새로움을 향한 정신과 욕망이 마그마처럼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새로움을 창의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의 그림자 때문인지, 그마저도 제대로 보란 듯이 앞세우지도 못하고 있다.

 

 그 시인은 어쩌다 그런 자세를 가지게 되었을까. 아마도 근복적으로는 자신의 시 쓰기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에서 나온 패턴의 반복' 내지는 '서정의 반복'에 대한 물림 현상이었을 것이다. 또한 새로운 영역의 시 쓰기를 향한 발걸음에 자신이 없거나 주위에서 그런 시도에 대해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의식을 스스로 하게 되거나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시인은 갈팡질팡하면서 엉거주춤한 자세에 길들여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인이 자신의 시 쓰기를 포기할 것 같지는 않다. 서정에 대한 본성은 근본적인 바탕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숨을 쉬듯 푸른 하늘에 시를 적을 것 같고, 새로움에 대한 갈망 또한 그의 정신에 깊이 새겨져 있는 욕구 자체여서 의지와 의욕이 그 시인의 생애가 다하는 내내 꿈틀거리며 움직일 것 같다.

 

 대중과의 거리 두기를 하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시를 쓸 것인지, 아니면 대중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따른 무력감의 안개에 휩싸여 적당히 살아가면서 시를 쓸 것인지, 아니면 '대중은 없다'는 초지일관의 생각으로 아예 하고 싶은 대로 나름의 생각에 따른 시를 쓸 것인지, 도무지 그 속마음을 알 수가 없는 그시인.

 

 그 시인은 자주 갈팡질팡한다. 그 시인의 자세는 늘 엉거주춤이다. 그런 그 시인을 보는 주변의 시선이 어떨지 궁금해하는 그 시인은 오늘도 두 세계의 자기장에 끌리며 좌충우돌한다. 오락가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대를 탓하고 시선을 탓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자신의 능력이 없고 재능이 부족함을 절감할 뿐이다.

 

 그 시인을 만나면 가끔 드러내는 그의 속내를 들을 수 있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 세계의 질감과 그 속에 들어있는 결이 같은 시인들의 흐름이나 출현이 있다면 자신도 힘을 낼 수 있을 텐데 하는... 그런 말을 나지막이 들려주고 돌아가는 그 시인의 뒷모습.

 

 자세히 보니 비틀거리지도 않고 방향도 없이 가는 길도 아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기 집에서 기 다리고 있는 가족을 향해 단정하면서고 고요하게 가는 모습이다. 그 시인의 등이 따뜻하게 보이기는 처음이다.

 

-시인수첩 2023. 여름호

 

 


 

이종섶 시인

1964년 경남 하동 출생.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졸업. 2007년 기독교타임즈문학상 '점자경전' 당선.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물결무늬 손뼈 화석』. 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