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진규 시인 / 배롱나무꽃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5.
정진규 시인 / 배롱나무꽃

정진규 시인 / 배롱나무꽃

 

 

 어머니 무덤을 천묘하였다 살 들어낸 어머니의 뼈를 처음 보았다 송구스러워 무덤 곁에 심었던 배롱나무 한 그루 지금 꽃들이 한창이다 붉은 떼울음, 꽃을 빼고 나면 배롱나무는 骨格만 남는다라고 금방 쓸 수도 있고 말할 수도 있다 너무 단단하게 말랐다 횐 뼈들 힘에 부쳐 툭툭 불거졌다 꽃으로 저승을 한껏 내보인다 한창 울고 있다 어머니, 몇 萬里를 그렇게 맨발로 걸어오셨다

 

 


 

 

정진규 시인 / 심검당(尋堂)에서

 

 

 명산(名山)에 들면 보인다 어김없다 단서(端緖)를 잘 잡고 서 있는 봉우리가 하나씩 있다 붓끝과 같다 하여 그 첨단을 필봉(筆峰)이라 이른다 너의 단서에 내 혀를 나의 단서를 처음 댔을 때 그토록 와서 닿았던 우주의 뜨거운 율단(律端), 떨리던 필봉과 필봉 그게 모든 사물들에게도 꼭 하나씩 꼭지로 솟아있다고 믿는 단서(但書)로 나의 시들은 그간 씌어왔음을, 내 사랑의 단초도 그러하였음을 시력 좋은 분들은 찾아 읽었을 것이며, 그것이 그저 단서(但書)로 끝나고 있는 것들 또한 추려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 요새는 도처에 잡히지 않는 단서(端緖) 투성이다 보이지 않는 것 투성이다 나도 애를 먹고 있다 백내장 수술도 했다 했으나 신통(神通)치 않다 헛것만 보인다 필봉(筆峰)이 솟지 않는다 어제 오늘 내리는 난분분(亂紛紛)의 춘설(春雪)들 눈송이 하나하나에도 단서(端緖)가 있는 법이어서 저리 난분분을 지으는 것인데 형상을 보이는 것인데 그 속에도 산수유 노오랗게 치를 떠는 것인데 나도 치를 떠는 것인데 우수 경칩도 지났다 지척인 봄, 어디 갔느냐 심증은 잡았다 물증을 잡아야 하리 단서를 얽은 단서를 끊어내야 하리 다른 길 없다 심검(尋檢)이다 칼을 찾아라!

 

 


 

정진규(鄭鎭圭) 시인 (1939-2017)

1939년 경기도 안성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마른 수수깡의 平和』 『有限의 빗장』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매달려있음의 세상』 『몸詩』 『알詩』 『도둑이 다녀가셨다』 『本色』 『껍질』 『정진규 시선집』 『공기는 내 사랑』 『사물들의 큰언니』 외 다수. 한국시인협회상, 현대시학 작품상, 월탄문학상, 공초문학상, 불교문학상, 이상시문학상, 만해대상 등을 수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 1988년부터 시전문 월간지 현대시학(現代詩學)》 주간 역임. 2017년 폐혈증 증세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