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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금진 시인 / 악의 꽃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4.
최금진 시인 / 악의 꽃

최금진 시인 / 악의 꽃

 

 

할머니 무덤 이장하다가 보았다

꽃과 나무들이 육식성이라는 것 강아지처럼 귀여운

솜털의 뿌리가 무덤을 향해 입을 내밀며 쪽쪽

빨아대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흐물흐물한 몸에서 손톱과 발톱과 머리털을 뻗어

관을 후벼파고 기어 나왔다

할머니, 하얗게 피어난 꽃이었다

구덩이 속에 뱀처럼 엉겨붙은 뿌리들은

햇빛이 닿는 순간에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흙 속에 흘러든 검은 체액을 빨아대고 있었다

향을 피우고 독한 술을 부었다

땅 속의 썩은 입 냄새를 감추기 위해

무덤의 꽃들은 현혹색을 입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아가, 나다, 할미다, 피묻은 입술과

멍든 살코기를 매달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삽으로 뿌리를 찍었다

할머니, 허연 머리털이 뽑혀 나갔다

어둠에 촉수를 박아 넣은 것들은 모두 음주광성

내 습한 겨드랑이가 간지러운 것도 그 때문

나를 빨아먹고서야 시들어버릴 털 때문

화장품을 바르고 향수를 뿌리고

내가 누군가의 몸에 꽃 피우고 싶은 것도 그 때문

삽날에 찍힌 아카시아 뿌리들이 드러났다

나는 미친 듯이 할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할머니! 제발! 이제 그만 하세요!

 

 


 

 

최금진 시인 / 달과 함께 흘러가다

 

 

사내는 커튼을 연다

밤의 내장이 훤히 다 보이는 창문

이 집에선 참 많이도 아팠다, 사내는

옷 가방 위에 걸터앉아 방안을 돌아다본다

고장난 싱크대의 卒卒卒, 소리 아래엔

장기알 몇 개가 고여있다

뭉치가 되어 구르는 자신의 머리카락과 까칠한 음모를

사내는 흰 편지봉투에라도 담아

달에게 보내주고 싶었다

잠시 손톱을 깎으며 사내는 달을 본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혼자 떠도는 것들은

모두 외통수다, 마지막으로 사내는

엑스레이 필름처럼 흰 뼈가 다 비치는

달을 가져가고 싶다

누구든 통째로 집을 들고 이사갈 수는 없다

창문을 열고 홀로 내다보던 쓸쓸한 풍경 서너 장을

겨우 스티커처럼 기억 속에 붙이고 갈 뿐이다

사내는 가방의 바깥 지퍼를 열어

창틀에 꽂힌 자신의 증명사진 한 장을 넣는다

끝이다, 문이 닫힌 빈 방은 오래도록

혈우병처럼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卒卒卒, 사내는

천천히 현관문을 닫으며 어둠 속으로 흘러간다

 

 


 

최금진 시인

충북 제천에서 출생.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97년《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01년 《창작과비평》 신인시인상 수상. 시집 『새들의 역사』 『황금을 찾아서』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산문집 『나무 위에 새긴 이름』. 2008년 제1회 오장환문학상, 2019년 제 12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상 등 수상. 동국대, 한양대 등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