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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용미 시인 / 국화잎 베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4.
조용미 시인 / 국화잎 베개

조용미 시인 / 국화잎 베개

 

 

국화잎 베개를 베고 누웠더니

몸에서 얼핏 얼핏 산국 향내가 난다

지리산 자락 어느 유허지 바람과 햇빛의 기운으로 핀

노란 산국을 누가 뜯어주었다

그늘에 며칠 곱게 펴서 그걸 말리는 동안

아주 고운 잠을 자고 싶었다

하얀 속을 싸서 만든 베개에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아픈 머릴 누이고 국화잎 잠을 잔다

한 생각을 죽이면 다른 한 생각이 또 일어나

산국 마른 향을

그 생각 위에 또 얹는다

몸에서 자꾸 산국 향내가 난다

나는 한 생각을 끌어안는다

 

 


 

 

조용미 시인 / 저녁의 창문들

—베네치아

 

 

이곳에는 말을 거는 창문과 침묵하는 창문들이 있다

낮엔 거의 침묵하고 있지만

어둠속에서는 제법 말이 많다

한 집에 속한 각각 다른 크기와 모양의 모든 창문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집의 창문들 위로 밤이면 조금씩

물의 더듬이가 움직여 맨 위층까지 올라간다

불빛이 물의 일렁임을 벽으로 밀어올린다

물빛은 담장이처럼 천천히

집의 벽을 타고 이동한다

집은 밤마다 물의 화폭에 휩싸인다

벽에 새기는 물의 부조들을 맞은편 창에서 내려다본다

집이 물의 무늬에 잠기는 것을,

가로등이 켜질 때마다 물의 색이

어룽어룽 스며드는 것을,

창안의 그는 몸에 물의 무늬가 드는 것도 모르겠지

속삭이고 침묵하는 온갖 창문들의 습식 프레스코화가

완성되는 물의 도시의 길고 휘황한 밤

밤의 창문들마다 아가미가 달려있다

 

 


 

조용미(曺容美) 시인

1962년 경북 고령군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 『나의 다른 이름들』 『당신의 아름다움』. 산문집 『섬에서 보낸 백 년』. 김달진문학상, 김준성문학상, 고산문학대상, 목월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