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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연 시인 / 겨울 감정
낙엽을 길바닥에 끌고 다니는 겨울은 길다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은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걷는다
주머니 속에서 비슷한 말들이 부딪친다 너는 잘 가고 있다. 나도 고민하고 있다 길고도 짧은 말이다. 목에 감긴 목도리는 조용하다 골목길엔 가로등이 화분처럼 놓여있다. 반짝이고 따뜻한 것이 필요하다
목도리는 내 목을 풀었다 감았다 풀었다 감았다 목도리는 죽을 때까지 자작나무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따뜻한 눈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혼자서 말하고 상가 건물은 떠오르는 꽃처럼 혼자서 환해진다
냉장고 속에서 유통기한을 지나고 있는 참 길고도 짧은 하루
한 나무가 죽을 때까지 드러내도 다 드러나지 않는 이 긴 겨울의 대오에서 영원처럼 나타나지 않는 눈의 요정은 이탈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잘 가고 있다. 나는 고민하고 있다 주머니 속 동전의 절반은 길고도 차가운 잠이 들었다
이재연 시인 / 당신은 잘 가고 나는 잘 왔습니다
겨울이 남아 있기엔 바람이 부족하고 봄이 오기엔 사용해야 할 겨울이 아직 남아 있다 누군가 왔다 갔던 길이 자꾸 떠올라 사라지지 않은 것도 침묵이고 다시 기억하지 않으려고 이름을 오래 안고 있었던 것도 침묵이다 여긴 너무 고요해 문을 열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바람이 강의 물살을 건드린다 흙은 스스로 부풀어 올라 입김을 토한다 왜 이리로 와야 했는지 꼭 이 길로 와야만 했는지 햇살이 아른거린다 조용한 고지대에 올라 조금 남아 있던 너를 아주 보낸다 실내등을 끄고 자꾸만 어둠을 바라보려 했던 마음도 너와 함께 보내고 난 후 겨울나무에 물색이 돌아온다 슬그머니 뒷모습을 감추었던 고양이가 골목으로 돌아온다 한 조각 햇살ㄹ을 끌어당기던 오후의 벤치도 빈자리를 데우고 있다 그때 너 보내고 없는 주소지에 나보다 먼저 꽃이 돌아와 있었다 -시집 『화요일이었고 비는 오지 않았다』 (파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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