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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미라 시인 / 짖지 않는 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9.
박미라 시인 / 짖지 않는 개

박미라 시인 / 짖지 않는 개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목숨처럼

목소리를 양식 삼아 연명하듯 짖지 않는 개

잠꼬대 속에서 꺼내는 외마디가 아니었다면

저 개의 실어증을 까마득 몰랐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 사랑을 앓는 증상은

모두 다르겠지만

 

십년이 넘도록 고쳐지지 않는 저 개의 실어증은

어쩌면 스스로 작정한 형벌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주 잊지는 않으려는 말이 있는 듯

비명처럼, 울음처럼, 잠꼬대를 한다

 

버린 적도 없고 버려진 적도 없는 이별 앞에서

스스로 제 말을 삼키고

짖지 않는 개 한 마리 십년째 내 집에 머문다

 

믿지 않겠지만,

들리지 않는 저 개의 비명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기도 한다

 

 


 

 

박미라 시인 /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

 

 

코피를 쏟았다

검붉은 꽃잎이 수북이 쌓인다

꽃잎으로 위장한 편지

핏빛 선명한 이 흘림체의 편지를

나는 읽어낼 수 없다

 

행간도 없이 써 내려간 숨막히는 밀서를

천천히 짚어간다

꽃잎 뭉개지는 비릿한 냄새 온 몸에 스멀댄다

기억의 냄새만으로도

노을이 타오르고 맨드라미 자지러지는 저녁을

맨발의 내가 엎어지며 간다

이 편지의 수취인은 내가 아니다

녹슨 우체통 속에서 늙어가는

뜯지 않은 편지를

먼지 자욱한 세상의 뒤쪽으로 반송한다

 

젖은 꽃잎을 떼어 빈 봉투에 부친다

어딘가의 주소를 적는다

여기는 백만 년 후의 무덤이라고 쓴다

 

집 잃은 아이처럼 헤매는 비린내를 거두어 담는다

붉은 글자들을 손바닥으로 쓸어 담는다

받는 이의 주소를 적는다

몸이 쓴 편지를 읽을 줄 아는 마음에게 라고 쓴다

백만년 전에도 마음이었던 그대

여기, 지워진 행간을 동봉한다

 

 


 

박미라 시인

경기도 광주 출생.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199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서 있는 바람을 만나고 싶다』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 『안개부족』 『우리 집에 왜 왔니?』 『비 긋는 저녁에 도착할 수 있을까』 등. 수필집 『그리운 것은 곁에 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2020년). 충남문화재단창작지원금.(2016년.2019년). 세종우수도서선정(2015년). 현재 나사렛대학교 평생교육원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