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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라 시인 / 짖지 않는 개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목숨처럼 목소리를 양식 삼아 연명하듯 짖지 않는 개 잠꼬대 속에서 꺼내는 외마디가 아니었다면 저 개의 실어증을 까마득 몰랐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 사랑을 앓는 증상은 모두 다르겠지만
십년이 넘도록 고쳐지지 않는 저 개의 실어증은 어쩌면 스스로 작정한 형벌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주 잊지는 않으려는 말이 있는 듯 비명처럼, 울음처럼, 잠꼬대를 한다
버린 적도 없고 버려진 적도 없는 이별 앞에서 스스로 제 말을 삼키고 짖지 않는 개 한 마리 십년째 내 집에 머문다
믿지 않겠지만, 들리지 않는 저 개의 비명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기도 한다
박미라 시인 /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
코피를 쏟았다 검붉은 꽃잎이 수북이 쌓인다 꽃잎으로 위장한 편지 핏빛 선명한 이 흘림체의 편지를 나는 읽어낼 수 없다
행간도 없이 써 내려간 숨막히는 밀서를 천천히 짚어간다 꽃잎 뭉개지는 비릿한 냄새 온 몸에 스멀댄다 기억의 냄새만으로도 노을이 타오르고 맨드라미 자지러지는 저녁을 맨발의 내가 엎어지며 간다 이 편지의 수취인은 내가 아니다 녹슨 우체통 속에서 늙어가는 뜯지 않은 편지를 먼지 자욱한 세상의 뒤쪽으로 반송한다
젖은 꽃잎을 떼어 빈 봉투에 부친다 어딘가의 주소를 적는다 여기는 백만 년 후의 무덤이라고 쓴다
집 잃은 아이처럼 헤매는 비린내를 거두어 담는다 붉은 글자들을 손바닥으로 쓸어 담는다 받는 이의 주소를 적는다 몸이 쓴 편지를 읽을 줄 아는 마음에게 라고 쓴다 백만년 전에도 마음이었던 그대 여기, 지워진 행간을 동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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