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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미 시인 / 정오의 축복
오늘은, 망해버린 회사의 상표를 단 냉장고가 갑각류 껍데기 씹는 소리를 내는 계절 어제 남긴 식은 밥이 누룽지가 되어 양푼 안에서 딴딴해지는 계절 소리 없이 허공을 박음질하는 선인장이 흙 속에 파묻은 대가리를 살찌우는 계절 킬라를 마신 파리가 두 눈 부릅뜨고 뱅글뱅글 죽을 때까지 팽이처럼 돌아가는 계절
여긴, 속이 허한 아이들에게 점심과 함께 욕과 노란 먼지까지 제공되는 특별한 별 트렘플린 위에 올라가 창자가 끌려나오도록 뛰고 또 모락모락 담배로 안개를 만들어도 시간이 남는 별 때때로 주먹 대신 머리로 벽을 들이받아야 하는 별 열 살 때까지 엄마를 언니로 알고 사는 희한한 별 스무 살도 안 된 소녀들이 서둘어 늙어 가는 별 자신보다 빨리 자라는 배때기 앞에서 공포에 떠는 별
안다, 머리통은 열쇠 없는 자물통이라는 것 아무리 들쑤셔도 고통은 꺼낼 수 없다는 것 머릿속으로 자라는 뿔은 뽑히지 않는다는 것 울음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지금은 정오 돌멩이가 제 그림자에 뼈를 만드는 시간 병든 개가 턱뼈를 덜그럭거리며 운동장을 뛰는 시간 유리창에 모여든 아이들의 치아에서 간혹 새까만 침묵이 굴러 떨어지기도 하는 시간 축복의 시간
-시인정신 201년 겨울호
김개미 시인 / 높은 옥수수밭
옥수수밭이 산기슭까지 이어지고 동생과 나는 나무뿌리가 드러난 절개지에 손을 넣었다 깊이 집어넣을수록 젤리같이 고운 황토 우리는 집을 짓고 학교를 짓고 궁전을 짓고 병원을 지었다
노을이 우리의 손목에 붉은 수갑을 채우면 오솔길과도 같은 수백 개의 옥수수밭고랑이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으르렁거렸다 우리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노루처럼 귀를 새우고 떠들어댔다
뻐꾸기 울음소리는 옥수수밭을 넘어가지 못해 여긴 세상 끝이야 아무도 우리를 찾지 못해 뭐 하는지도 몰라 내가 너를 먹어도 네가 나를 죽여도
맞아, 우리 엄만 맨날맨날 누워 있어 그게 엄마의 일이야 천장을 쳐다보고 눈물을 줄줄 흘리지만 울지는 않아 죽지도 않고 자지도 않아!
그러니까 우린 우리 마음대로 해도 돼 집에 안 가도 돼 지금 여기서 죽어도 돼
멀리서 저녁 연기가 피기 시작하면 하얗게 늙은 엄마가 구렁이처럼 구불구불 옥수수밭고랑을 기어올까봐 살아있는 귀신이 우리 이름을 부를까봐 생기지도 않은 젖가슴을 후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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