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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연호 시인 / 겨울 우듬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8.
강연호 시인 / 겨울 우듬지

강연호 시인 / 겨울 우듬지

―교무수첩·3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텅 빈 교정을 바라보며

창틀에 턱을 괸 미루나무 넋놓고 있었다

바람이 툭 치고 달아나며 깔깔거리면

용케 두어 장 남은 잎새들 슬쩍 눈꽃을 턴 뒤

내내 심심할 모양이라고 투덜거렸다

평행봉은 혼자서도 팔 벌려 균형 잡으려 열심이고

불시착한 비행기 자국마냥 운동장을 가로질러

쪽길 만드는 수위아저씨의 비질 소리만

구령에 맞춰 씩씩한 겨울 방학

나는 교무실 석탄난로 옆에서 쓸쓸한 당직을 쬐며

개학날의 출석부를 미리 점검하고

아이들에게 그림 엽서 하나씩 부쳐주었다

얘들아, 겨울 우듬지 꼿꼿하게 버티어 선 계절을

조선장독 속의 김장김치처럼 잘 익어 돌아오너라

 

 


 

 

강연호 시인 /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엄마를 기다리다 허기마저 지친 오후

방죽 너머 긴 머리채를 푸는 산그늘이 서러워질 때

언젠가 무작정 상경하고 싶었지만 갈 곳 몰라

이름 모를 역광장에 입간판처럼 서 있을 때

어느새 조약돌만큼 자란 목젖이 싫어

겨울 다가도록 목도리를 풀지 않고 상심할 때

쉽게 다치는 내성의 한 시절을 조용히 흔들며

가만가만 가지마다 둥지를 트는 속삭임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내가 실연의 강가에서 하염없이 출렁거리는

작은 배 한 척으로 남아 쓸쓸해질 때

세상의 모든 그리운 것들은 도무지

누군가 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는 줄 모른다며

알면서도 모른 척 무시한다며 야속해질 때

그래, 비밀 같은 바람소리였네 숨 죽여 들을수록

낮아져 하마 끊길 듯 이어지는 다독거림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허나 운명은 언제나 텅 빈 복도를 울리며

뚜벅뚜벅 걸어와 벌컥 문을 열어젖히는 법이네

다짜고짜 따귀를 후려치고 멱살 낚아채

눈 가리고 어디론가 무작정 끌고 가는 것이네

내 어느날 문득 더 자랄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묵념처럼 세상은 함부로 권태로워지고

더 이상 간직할 슬픔 하나 없이 늙어가는 동안

옛날에 나무에 스치며 나를 키우던 바람소리

다시는 듣지 못했네 들을 수 없었네

 

 


 

강연호(姜鍊鎬) 시인

1962년 대전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 현재 원광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 199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歲寒圖〉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1995년 제1회 현대시동인상 수상. 시집 《비단길》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기억의 못갖춘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