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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인 시인 / 교우록
눈이 내렸다 어둠 속에서 말 못할 것들이 흩날렸다
내리는 눈은 친구가 아니라서 바닥에 쌓이거나 행인의 발길에 밟힐 것이다
내리는 눈 속에서 눈을 치우는 사람들이 문밖에 나와 있다
호랑이 한 마리 나타나 울부짖으면 내린 눈들이 화들짝 놀라 하늘 속으로 눈 내리러 다시 올라갈 것만 같았다
친구는, 내려오는 친구는 저렇게 하얗고 속절없이 많아도 다 내가 더럽혀야 할 눈이었다
내리지 않는 눈이 가장 순수한, 착한 눈이었다 친구는 죽은 친구가, 아직 만나지 않은 친구가 제일 좋은 친구다
이미 치워진 눈과 치워진 눈 위에 밤을 새워 내리는 눈과 이미 눈 녹은 물로 내 신발을 적시는 눈과 눈을 뭉치며 달아나는 친구의 뒤통수에 정확히 박히는 눈과 말없이 뒤란 그늘 속으로 숨어드는 눈과 함께 친구는, 죽은 친구가 제일 착한 친구였다
-시집 <교우록> 문학과지성사, 2005
유종인 시인 / 수수밭 전별기
호수공원 철조망 너머로 수수밭 행렬이 지나간다 맨발에, 맨종아리들이다 제자리서 오래 흔들린 저들, 흔들려, 가둘 수 없는 수수 머리다 머리에 붉은 양파 망(網)을 쒸운 가을, 수수 머리에 든 게 많을수록 시장한 새들의 눈초리, 참극이 모여든다 홍건적처럼 붉은 양파 망 뒤집어쓴 수수 행렬을 나는 방관하였다 나는 나를 수수방관하여 홑겹의 세상에 묵은 곁을 두었다 하, 허공의 단두대까지 자라 올라간 수수 머리 홍건족들이여, 흙먼지 이는 그 허망까지 말 달려갈 황야라도 좋았다 말을 놓치고서야 말이 매였던 자리가 침묵의 그루터기다 말을 매어야 할 자리에 발이 묶여 내륙 저편은 아득하고 수수 머리만 자꾸 주억거린다 말을 다 하지 못한 피가 수수 발목에 한 모금씩 젖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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