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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종인 시인 / 교우록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8.
유종인 시인 / 교우록

유종인 시인 / 교우록

 

 

눈이 내렸다

어둠 속에서

말 못할 것들이 흩날렸다

 

내리는 눈은

친구가 아니라서

바닥에 쌓이거나

행인의 발길에 밟힐 것이다

 

내리는 눈 속에서

눈을 치우는 사람들이

문밖에 나와 있다

 

호랑이 한 마리 나타나 울부짖으면

내린 눈들이 화들짝 놀라

하늘 속으로 눈 내리러

다시 올라갈 것만 같았다

 

친구는, 내려오는 친구는

저렇게 하얗고 속절없이 많아도

다 내가 더럽혀야 할 눈이었다

 

내리지 않는 눈이

가장 순수한, 착한 눈이었다

친구는

죽은 친구가, 아직 만나지 않은 친구가

제일 좋은 친구다

 

이미 치워진 눈과

치워진 눈 위에 밤을 새워 내리는 눈과

이미 눈 녹은 물로 내 신발을 적시는 눈과

눈을 뭉치며 달아나는 친구의 뒤통수에 정확히 박히는 눈과

말없이 뒤란 그늘 속으로 숨어드는 눈과 함께

친구는, 죽은 친구가 제일 착한 친구였다

 

-시집 <교우록> 문학과지성사, 2005

 

 


 

 

유종인 시인 / 수수밭 전별기

 

호수공원 철조망 너머로 수수밭 행렬이 지나간다

맨발에, 맨종아리들이다

제자리서 오래 흔들린 저들,

흔들려, 가둘 수 없는 수수 머리다

머리에 붉은 양파 망(網)을 쒸운 가을,

수수 머리에 든 게 많을수록

시장한 새들의 눈초리, 참극이 모여든다

홍건적처럼 붉은 양파 망 뒤집어쓴 수수 행렬을 나는 방관하였다

나는 나를 수수방관하여

홑겹의 세상에 묵은 곁을 두었다

하, 허공의 단두대까지 자라 올라간

수수 머리 홍건족들이여,

흙먼지 이는 그 허망까지 말 달려갈 황야라도 좋았다

말을 놓치고서야 말이 매였던 자리가

침묵의 그루터기다

말을 매어야 할 자리에 발이 묶여

내륙 저편은 아득하고 수수 머리만 자꾸 주억거린다

말을 다 하지 못한 피가

수수 발목에 한 모금씩 젖어 있다

 

 


 

유종인 시인

1968년 인천 출생. 시립인천전문대학 문헌정보학과 졸업. 1996년 《문예중앙》에 시 〈화문석〉 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 200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과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 『아껴 먹는 슬픔』 『교우록』 『수수밭 전별기』 『숲시집』 시조집 『얼굴을 더듬다』 등. 지리산문학상, 송순문학상, 지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