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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경 시인 / 파동 방정식
고요는 잡식성, 고통도 슬픔도 모두 삼켜버린다
새끼들이 고요를 찢고 하나둘 깨어나더니 모닝 커피잔의 잔물결을 따라 흥얼흥얼 춤을 춘다
오카리나의 자궁 속은 태풍의 핵 초박막 아이들이 초조와 흥분을 숨기고 부르자마자 튀어나와 경주마처럼 달음질한다
가을 낙엽송 가지 끝에도 전쟁터 한복판에도 어디나 크고 작은 별별 모양의 폐공간이 있다 그들은 온갖 색깔과 자태로 떨다가 기회를 타서 탈출하여 사방으로 쏜살같이 흩어진다 무엇에든 부딪쳐도 틈만 있으면 에돌이하고 서로 간섭하는 것은 그들의 습성
외풍이 나뭇가지의 운동 궤적 변화와 협상하다가 너는 태어났고, 낙엽의 추락 속도는 덤이다
너는 원자, 절대영도 근처의 고독 속에서도 사랑을 하고 빛을 먹고 자란 어둠의 자리마다 새끼들이 깨어나고 별도 은하도 너에게서 나왔고
달빛도 생명체들의 아우성도 너의 새끼들 너는 그들의 자궁이고 무덤 너는 파동의 어미
이시경 시인 / 어느 과학자의 악몽
초등이라고 암벽 타기를 시작했다 아래는 밋밋하나 안개 낀 벽 청설모가 낙우송 오르듯이 위만 보고 네 발로 달렸다 쉬지 않고 오르다 보니 새소리 벌레소리가 죄 끊겼다 혼자 가는 외길이었다 점점 더 올라갈수록 질병의 속삭임만이 나를 바짝 따라붙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즈음 뒤돌아 밑을 보니 암벽이 빙벽으로 변하고 있었다 오줌발이 약해지고 눈이 침침해져서야 내려가려 했으나 내려가는 것은 자살이었다 올라온 길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도덕적 해이 표절 시비가 간간이 들려왔다 열악한 연구실 속에서 실험 조건이 잡히지 않는다 실험치들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그러나 석양은 아름다웠다 그 너머 암흑세계는 보이지 않아 더욱 빛났다 하늘에 닿을 듯 홀로 뾰쪽 솟은 빙산 꼭대기 혼자 있기도 아찔한 공간 모든 길이 빙폭으로 끊겨있었다 공포로 온몸이 얼어 암벽 위에서 오토바이 타듯 부들부들 떤다 실험 데이터들도 떨고 있다 추락하다가
아, 시계가 다시 돈다
-시집 『라마누잔의 별 헤는 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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