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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국 시인 / 계곡지 밤낚시
취생몽사의 하룻밤을 꿈꿨던 건가
또 이만큼 세상과 떨어져 앉았다 등 뒤의 물소리가 서늘하다 산기슭 물길을 비켜 앉질 못했다
취기처럼 가물거리는 야광찌들, 반딧불마냥 깜빡대는데 물밑의 나뭇가지들 뼈마디처럼 빛났다
전생인 듯 후생인 듯 겹쳐지는 물결들, 오른쪽 귀로 흘러드는 물소리를 왼쪽 귀로 흘려보내지 못했다
공중엔 물그릇 같은 달이 떠 있고 시커먼 자루처럼 웅그린 낚시꾼들 랜턴 불빛 수신호를 주고받는데
묵직한 손맛은커녕 잔챙이 한 마리 물지 않으니 방죽의 흙구덩이에 얼굴을 뭉개면서 까닭 모를 용서를 빌어야 했다
내가 나를 다그쳐서 발 뻗은 자리, 고작 두어 걸음 안팎의 험하고 외진 땅, 멜빵끈 떨어진 낚시가방과 소주병, 육포 쪼가리 흩어져 있다
이윽고 아침이 밝아오고 하룻밤을 꽝 친 낚시꾼들 애먼 못물에다 욕지거리를 퍼붓는다 그 이마, 거친 물굽이 헤쳐 나온 뱃머리 같았다
오정국 시인 / 내 눈이 아니라면
늙고 병들었으나, 이 몸 빌어먹지 않게 하는 등짐, 아직은 내 살가죽이 견딜 만큼, 견뎌서 옮겨지는 소금과 녹차, 차마고도의 달빛들, 오직 하늘과 나는 새와 하늘이 퍼붓는 빗줄기의 벼랑길, 내 발자국 소리에 나를 파묻으며 걷는 밤, 나의 주인은나를 매질하여 늙은 몸을 부려 먹는 저를 질책하지만, 아직은 검은 눈을 껌벅이며 그 마음을 읽는다 내 눈이 아니라면 그도 앞을 볼 수 없으리라* 나는 늙고 병들었으나 그가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 내 눈이 아니라면 그도 앞을 볼 수 없으리라 : 독일 바로크 시대의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였던 안겔루스 질레지우스가 한 말로 '그'는 하느님 아버지를 뜻한다.
-시집 <파묻힌 얼굴> 민음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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