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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정국 시인 / 계곡지 밤낚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8.
오정국 시인 / 계곡지 밤낚시

오정국 시인 / 계곡지 밤낚시

 

 

취생몽사의 하룻밤을 꿈꿨던 건가

 

또 이만큼 세상과 떨어져 앉았다

등 뒤의 물소리가 서늘하다

산기슭 물길을 비켜 앉질 못했다

 

취기처럼 가물거리는

야광찌들, 반딧불마냥 깜빡대는데

물밑의 나뭇가지들

뼈마디처럼 빛났다

 

전생인 듯 후생인 듯

겹쳐지는 물결들, 오른쪽 귀로 흘러드는 물소리를

왼쪽 귀로 흘려보내지 못했다

 

공중엔 물그릇 같은 달이 떠 있고

시커먼 자루처럼 웅그린 낚시꾼들

랜턴 불빛 수신호를 주고받는데

 

묵직한 손맛은커녕

잔챙이 한 마리 물지 않으니

방죽의 흙구덩이에 얼굴을 뭉개면서

까닭 모를 용서를 빌어야 했다

 

내가 나를 다그쳐서 발 뻗은

자리, 고작 두어 걸음 안팎의

험하고 외진 땅, 멜빵끈 떨어진 낚시가방과

소주병, 육포 쪼가리 흩어져 있다

 

이윽고 아침이 밝아오고

하룻밤을 꽝 친 낚시꾼들

애먼 못물에다 욕지거리를 퍼붓는다

그 이마, 거친 물굽이 헤쳐 나온 뱃머리 같았다

 

 


 

 

오정국 시인 / 내 눈이 아니라면

 

 

늙고 병들었으나, 이 몸 빌어먹지 않게 하는

등짐, 아직은 내 살가죽이 견딜 만큼, 견뎌서 옮겨지는

소금과 녹차, 차마고도의 달빛들, 오직

하늘과 나는 새와

하늘이 퍼붓는 빗줄기의

벼랑길, 내 발자국 소리에 나를 파묻으며 걷는

밤, 나의 주인은나를 매질하여

늙은 몸을 부려 먹는 저를 질책하지만, 아직은

검은 눈을 껌벅이며 그 마음을 읽는다 내 눈이 아니라면

그도 앞을 볼 수 없으리라* 나는 늙고 병들었으나

그가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 내 눈이 아니라면 그도 앞을 볼 수 없으리라 : 독일 바로크 시대의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였던 안겔루스 질레지우스가 한 말로 '그'는 하느님 아버지를 뜻한다.

 

-시집 <파묻힌 얼굴> 민음사, 2011.

 

 


 

오정국 시인

1956년 경북 영양 출생. 198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 『모래무덤』 『내가 밀어낸 물결』 『멀리서 오는 것들』 『파묻힌 얼굴』 『눈먼 자의 동쪽』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시론집 『현대시 창작시론-보들레르에서 네루다까지』 『야생의 시학』 등. 제12회 지훈문학상, 제7회 이형기문학상 수상. 전봉건문학상 등 수상. 현재 한서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