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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재종 시인 / 화관花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8.
고재종 시인 / 화관花冠

고재종 시인 / 화관花冠

 

 

큰아들처럼 벼슬이 높은 맨드라미꽃이다

딸내미들처럼 화사한 다알리아다

운명에 간 막내가 좋아한 자줏빛 과꽃이다

아무리 봐도 처녀 적 꿈은 매혹적인 천일홍 같다

영감 죽고 나서 애면글면 가꾸어 온 꽃길에서

망백의 할머니는 안 먹어도 배가 불러서

 

그 쭈그렁 신수가 활연 펴지는 웃음이다

 그것이 이미 천국에 닿아 있는 웃음이다

 

-시집 『고요를 시청하다』에서

 

 


 

 

고재종 시인 / 낡은 벽시계​

 

사회복지사가 비닐 친 쪽문을 열자

훅 끼치는 지린내하며 어두칙칙한 방에서

두 개의 파란 불이 눈을 쏘았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산발한 노인의 품에 안긴

고양이가 보이고, 노인의 게게 풀린 눈과

침을 흘리는 입에서 알 수 없는 궁시렁거림,

그 위 바람벽의 사진액자 속에서

예닐곱이나 되는 자녀 됨 직한 인총들이

노인의 무말랭이 같은 고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마지막으로 모여들게 되는

그 무엇으로 되돌릴 수 없는 이 귀착점에서,

일주일에 세 번씩 고양이의 형광에 저항하며

노인의 극심한 그르렁거림을 지탱시키느라

사회복지사는 괘종시계 태엽을 다시 감는다

 

-시집 『고요를 시청하다』에서

 

 


 

고재종(高在鐘) 시인

1957년 전남 담양 출생. 담양농업고등학교 졸업. 1984년 실천문학사의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새벽 들> <사람의 등불>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쪽빛 문장> 등. 수필집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 제16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수상. 영랑시문학상 등 수상. 제11회 신동엽 창작기금 받음. 민족문화작가회의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