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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서영 시인 / 오후 산책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8.
박서영 시인 / 오후 산책길

박서영 시인 / 오후 산책길

 

 

하얀목련꽃 어제까지

오므렸던 입 오늘은 허연 이

드러내고 활짝 웃어주니

잠시 우울하면

기분이 덩달아 상큼해진다

 

한걸음 또 한걸음

길섶에 앙증맞게 핀 제비 꽃

나 좀 보아 달라고 손짓하는데 투정 부리는 바람에

길 위에 떨어진 작은 꽃잎은

튀밥처럼 흩어지고

 

아침에 쭈욱 꽃대 내밀고

뽀로통하던 민들레 햇살한줌 품고

생글거리는 웃음에 반했던지

사랑에 빠진 벌 한 마리 헤어나질 못하네

 

점박이 펜지 꽃

눈 웃음에 퐁당 빠져서

어머나 널 어쩜 좋니!

너무 귀여워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혼자 중얼거리다

돌아서는 발걸음 마음도

봄처럼 화사했던 오후 산책길

 

 


 

 

박서영 시인 / 울음의 탄생​

 

나의 눈동자는 색을 바꿀 줄 안다

앵두나무가 보이는 여관집 방문을 열고 앉아

일렁이는 가로등빛 그늘을 본다

하늘이 울음을 얼려 눈을 내리는 밤이다

족발에 소주 한 병 앞에 놓고

슬픔을 애도하는 밤이다

앵두 한 알 매달지 않았는데도

저 나무는 무겁고 힘들어

눈 쌓인 앵두나무 발목이 젖어 축축해

나는 무릎을 세우고 쭈그려 앉았는데

몸에 울긋불긋 지렁이가 피었다

밖이 어둡지도 않는데 밤이라고 하지말아요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생각이 깊어 슬픔이 탯줄처럼 길어지는 사이

순천의 한 여관 방에서

분홍색 목젖에 울음이 매달려 흔들린다

한 호흡만 더 건너가자, 생이여

추운 앵두나무를 몸 안에 밀어 넣고 있는

환한 가로등처럼​

눈이 녹아내려 드러난 앵두나무 뿌리가

족발처럼 자꾸 보여,

물어뜯고 싶어지게,

쭈그리고 앉아

발가락 열 개를 꾸욱꾸욱 눌러 본다

 

 


 

박서영 시인 (1968-2018)

1968년 경남 고성 출생. 부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수료.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좋은 구름』 유고시집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 제3회 고양행주문학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객원 편집위원 역임. 2018년 2월 3일 지병으로 타계(향년 5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