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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시인 / 검은 피아노의 흰 파도
검은 피아노 한 대 바닷가에 앉아 있네 파도는 피아노 발목을 감으며 흘러가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도 눈 꼭 감고 말해 주지 않고 나의 손가락은 도마뱀처럼 바닷속으로 달아난다 너는 멀리서 나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고 너는 단풍들과 희희낙락 떠들고 있고 나는 바닷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도마뱀, 사랑을 할 때 우리는 한 음악이었을까 손가락에 파도가 흘러넘친다 바다는 파도를 사랑하고 단풍은 단풍을 사랑하는 법, 나는 몸을 둥글게 말고 커다란 피아노에 몸에 싣고 바다 위에 떠 있듯이 구름이듯 흘러간다
하얀 건반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어진 시인 / 계단의 깊이
신발을 신는데 불이 켜졌다 계단을 오르는데 벽에서 땀이 났다 백 층 높이의 계단을 오르고 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벽이 높아진다 밑줄 그은 문장이 벽에 매달려 있다 신발이 계단을 밀어내고 있다 공간이 더 넓어지고 단어들이 너를 끌어올리고 있다 단어들 사이로 땀이 번져 가고 있다 잎사귀가 손바닥 위에서 자라고 있다 손바닥 위에서 문장이 돋아나고 있다 파란 줄기가 벽을 타고 오르고 있다 네가 계단을 오르고 있다 너의 숨소리가 가빠지고 있다 너의 발소리를 단어들이 따라가고 있다 나무들이 벽 위에서 점점 많아지고 있다 활엽수의 넓은 길들이 너를 이끌고 달려가고 있다 네가 산길을 오르고 있다 단어들이 너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고 있다 흰구름 속으로 너의 모자가 걸어가고 있다 네가 나무처럼 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흰구름이다 네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던 흰구름이다 네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벽 위에 나무들이 계속 자라고 있다 단어들이 너를 따라오고 있다 단어들 사이에서 너는 몸을 작게 움츠리고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문장들이 너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 너는 문장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네 손에서 자란 잎사귀가 너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 너는 잎사귀로 눈을 가리고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백 층 깊이의 계단으로 떨어지고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이 내리고 너는 벽을 타고 내려와 다시 계단을 오르고 있다 벽에서 나무가 자라고 있다 잎사귀가 너의 몸에서 자라고 있다 너는 문장들을 밟고 있다 단어들이 계속 계단을 만들고 있다 너는 단어들을 밟고 계단을 오르고 있다 너는 흰 구름을 밟고 문장을 오르고 있다 문장으로 연결된 계단을 밟고 너는 집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불이 꺼지고 너는 단어처럼 가만히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다 백 층 깊이의 계단을 파헤치며 너는 시를 읽고 있다 계단이 되어가는 나를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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