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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봉희 시인 / 신년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10.
박봉희 시인 / 신년회

박봉희 시인 / 신년회

 

 

다들 얼굴 한번 보자, 문자가 왔다

피붙이들의 모임, 그녀는 혼자서 남편과 아이의 빈자리를 독차지하고

회와 대게를 먹는다 살 발라 먹고 쌓인 게 껍질 위로 조카들 졸업,입학

축하 봉투가 오가고 식대와 부모임 용돈 때문에 회비를 거둔다 몇 푼의

생활비를 쪼개고 자식 학원비에서 삥땅한 돈이 그녀의 모자라는 회비다

모자라는 얼굴로 회비의 반을 슬쩍 내게 건넨다

얼굴 한 번 보려고 생각 없이 나왔는데

어두운 얼굴 가슴속에 묻은 그녀의 그늘을 본다

접시 위 살 발린 도다리

토막 나 매운탕 뚝배기 속 도다리 대가리

도대체, 왜, 나는, 너는, 도다리도 못되고, 매운탕도 못되고

오늘은 새해 첫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날을 쪼개 얼굴도 모르는

조상에게 세배를 올린다 그녀가 그녀를 위해 떨구었던 얼굴을 든다 다들

웃고 떠들며 휴대폰 셔터를 눌러낸다 오지 않은, 못살아 못 오는 여동생

얼굴이 그녀 얼굴에 빙의한다

우리가 다시 만날 날짜를 정할 때

흙 속에 반쯤 묻힌 토르소처럼 그곳에 없는

우리 밖의 그녀

말없이, 하얗게 그곳을 떠난다

 

 


 

 

박봉희 시인 / 쇼, 커튼콜

 

 

쇼핑카를 민다

서로 소용없는 취향과 식성이 다른 우린

함께 쇼핑카를 민다

 

쇼는 희극이라야 뒤끝 없지

 

나는 여기, 너도 여기

별거의 거리만큼 거리낌 없는 우리

 

기껏 초대형마트에서

각자 필요한 물건에 정신없이 한눈팔다가

쇼핑카 손잡이에 서로의 손이 겹칠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놀란 백합조개가 입 닫듯 손을 거두는데

 

쇼는 심장 서늘한 비극이 더 리얼하지

 

쇼윈도마네킹처럼 표정을 코디하고

희비극을 연기하는

우리의 무언극은 어디까지가 서막이지?

 

아무 일 일어난 적 없는

두 손아귀의 힘을 모아 쇼핑카를 끈다

나란히 손잡이를 잡고

나는 여기, 너는 저기

 

 


 

박봉희 시인

경북 포항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3년 《시에》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복숭아꽃에도 복숭아꽃이 보이고』 『따뜻한 이불을 덮고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