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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연 시인 / 껍질
가지에 매달렸던 설익은 감이 투욱 떨어져 나온다 꼭지가 익기도 전 비상을 꿈꾸었을까 돌부리에 머리가 짓 찢겨 한 생의 의복 왕창 벗겨진 틈 새로 진물 흥건하다 눌어붙은 갈피에 손끝을 얹어보면 끈적끈적한 생의 액이 함부로 비껴 앉지 못한 옴팡한 생채기를 무슨 어린(魚鱗)처럼 에둘러 감싸고 있다 제 속엣 것 죄다 내려놓고 자연이 썩어지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것일까 밖으로 엎질러져 방치된 껍질의 시간은 밤이 깊을수록 속마저 부패하기 마련인데 가끔, 바람 귀에 고개 끄덕이는 잔가지 아래로 익지 않은 감 비스듬히 눕는다
백소연 시인 / 청동 귀울음
적막의 옆구리 툭 치니 한 천년 극광에 젖은 경전 불쑥 불거져 나온다 유곽 안에 박제된 아홉돌기 젖꼭지 더듬어 가면 피안의 울음 속에 고려의 한 사내가 누워 있다 세월 격랑 온몸으로 받아내었을 저 종, 얼마나 낡은 소망들이 납의를 걸쳤다 벗었을까 제 몸을 내리치면 단숨에 수천 나뭇잎들 물살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억만 가닥 청동빛 파문 진저리치며 속속 터져 나온다 산그림자 들쳐업은 종신의 둥근 엉덩이가 열리지 않는 바깥으로 사정없이 흔들어댄다 세상에 맞물려 귀가 닳은 명징한 울음소리, 진종일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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