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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송이 시인 / 흑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11.
조송이 시인 / 흑매

조송이 시인 / 흑매

 

 

섣달 그믐달 맞은 첫 펀치가 워낙 세게 왔어

 

한 방에 나가떨어질 순 없잖아

무릎 꿇고 이 악물고 있는데

흰 피가 철철

몸뚱이 절간에 두고 빠져나갔어

 

내 몸 안에 조등을 매달기 직전까지

 

눈앞에 시커먼 허공이 선글라스 끼고 왔네

외투 속에 C컵의 먹구름 감추고

알아듣든지 말든지

씨앗 본 바람에게 이골이 나

도망가자는 팔다리 휘늘어뜨리며

과속으로 차를 몰고 나왔네

 

두 팔을 크게 벌려

뒤따라온 젖은 그림자 등 뒤에 세워 놓고

 

엎드려 팔꿈치 괸 채 이마를 바닥에 찍고

귀 쫑긋 모아 손바닥 위 올리고

마음으로 둥그렇게 구부려 허리로 가네

 

미친 봄바람에 실컷 얻어터졌으니

누가 좀 와 티끌 치우듯

여기서 꺼내 준다면

 

겨우 칼끝을 다 빠져나왔다 싶을 때

 

이런, 단숨에 큰 주먹 하나 또 눈앞을 지나가더라, 언니야

 

 


 

 

조송이 시인 / 종자를 맡기다

 

 

밭이랑 지천에 핀 토종 쑥부쟁이 따라

종일토록 해와 종종대다가

짬짬이 그늘에 내어 널다가

뭉치고 밟고 메치며 실컷 갖고 놀다가

못나고 거칠며 옹이 박힌 고구마를 추려내고

호미 자국 하나 없는 미끈한 놈들만 박스에 골라 담아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고구마 박스 사이 좁은 구석

쓱쓱 손바닥으로 훔쳐내고 모로 누워

울퉁불퉁 둥글둥글 잠을 잔다

 

농협기름 절절 끓는 안방은 멀찍이 두고

창고방 구석에서 고구마 쌔근쌔근 숨 쉬는 소리

봄여름가을 내내 노지를 나대던 씨알들의 소리

공기 통하게

생강은 절대 덮지 말고 열어 놓아라

자디잔 감자알 밖으로 내돌리지 말고

깡깡한 옥수수는 따듯한 거실에다 꼭 걸어 두어라

금쪽같은 내년 농사 내려놓는 잔소리

 

다른 농사는 남에게 다 내어주고

무슨 끙끙이로 떼어 낸 암 조각보다 소중히

씨알을 품고 한뎃잠을 잔다

 

노랗고 차지고 다디단 속살이 익느라

코 고는 소리조차 굵고 힘차다

 

 


 

조송이 시인

1959년 광주에서 출생. 전남대학교 간호대학 간호학과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2013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시집 『토끼풀 여자』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