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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수진 시인 / 가위 바위 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12.
장수진 시인 / 가위 바위 보

장수진 시인 / 가위 바위 보

 

 

저벅 저벅

설탕 밭을 가르며 지나가는 것들

 

조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영등포의 아파트에는

손에 책을 든 아이가

발코니에 잠들어 있다

나방으로 뒤덮인 아이의 얼굴

더듬이가 아이의 입안을 향해 있다

 

거리에선 지독한 단내가 난다

두통에 미간을 찌푸리는 행인들

 

찐득찐득한 걸음들

사내 고궁에

파충류가 자주 출몰하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이상하다

이상한 하루가 반복되고

이상한 일상이 지속된다

누구든 나를 쏘면

이 게임이 끝날 텐데

이것이 게임이라면

 

신경이 예민한 한 사내는

퇴근길에 자주 넘어진다

 

네눈박이 도마뱀과 두눈박이 사내가

서로 응시한다

사내의 입안에

도마뱀이 천천히 머리를 넣는다

사내는 벌벌 떨며 웃는다

 

(뭔지 모르겠어 우히히히)

 

어느 신경이든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과

구토와

신물과 거품

사내의 몸속으로

제 온몸을 밀어 넣는 도마뱀의 의지와

이명을 일으키는 단내 속에서

그는 구역질하듯 외친다

가위

 

남자의 마지막 말은 가위였다

 

주먹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커다란 포대를 끌고 사내에게 다가가

내용물을 쏟아붓는다

사내의 벌어진 입으로

흰 설탕이 한없이 쏟아져 들어간다

그의 몸은 설탕에 잠긴다

 

이 모든 장면을 그리는 화가가 있고

그 화가의 그림을 바라보며 혼절하는 아이가 있고

 

붕붕 날아드는 도시의 나방들

설탕에 취해 주저앉는 나방들

저벅 저벅

설탕 밭을 밟으며 지나가는

저 버그들

 

 


 

 

장수진 시인 / 그러나 러브스토리

 

 

비늘이 없는

 

절벽과

 

파도가 없는

 

퉁퉁 불은 발목과

뛰어오는 아이가 없는

 

잠듦

 

아무도 없는

물속 벤치에서

 

청년 차이코는 프스키를 연주한다

 

털이 무성한 동물의 목을 어루만지듯

물이 털이 아닐 리 없다는 듯

 

기린 두 마리가 서로의 목을 감아 조른다

증오가 사랑이 아닐 리 없다는 듯

 

연거푸

 

차이코의 열 손가락이

작은 원을 그린다

원은 곧 소멸하고

 

그렇게 파도

그렇게 음악

그렇게 해변

 

깊은 바다로부터 밀려 나온 손잡이들

 

잠든 사람들의 귓속으로

푸른 모래가 끝없이 들어간다

 

누군가는 근처 병원을 가고

누군가는 무의식에 음악을 둔다

 

그들 코끝의 소금

한 톨

 

 


 

장수진 시인

1981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연기 전공) 졸업. 2006~2010 극단 〈골목길〉단원. 2012년 제12회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사랑은 우르르 꿀꿀』 『그러나 러브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