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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석 시인 / 낮잠
밖은 궁금하지 않았다먼 길 걸어 집에 촛불 켜는 날자꾸 잠이 쏟아졌다누군가가 말을 시켰다 허기였다선잠결에 잠깐 스쳐간 빛의 무늬그 이후로 내가 본건어둠도 대낮도 아닌커튼 깃에 스며든 투명한 어둠얕은 물가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한그저 막막한 쪽배를 타고어디론가 떠가는 느낌이랄까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서이따금씩 들려오는 늑대의 울음소리그럴 때마다 나는 어린 양에게모유를 먹이듯꿈결 밖으로 길게 젖을 물렸다
어둠만큼 촛불이 사위를밀어놓는 저녁마음과 몸의 경계가저렇듯 흔들리는 마을입구에서토할 것 같은 생각들뒤따라 온 형색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붉은 구름처럼 몰려다녔다 얼른숨을 곳을 찾아야 했다눈을 감았다잠시 어둠은 더욱 또렷해지고희미해져가는 쪽은바깥이 아니라 자꾸만 안이었다접경지역의 얕은 물가를 어른거리는물풀들의 그림자처럼 오랫동안 나는서성거렸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꿈속에서 또 얼마나 걸었을까발이 저려왔다 어둠이 집집마다점호를 하고초저녁별이 일찍 귀가하는날이면 촛불 대신 알전구를 켰다우선 눅눅한 방안을 뎁히고꿈결에 집요하게 달라붙은 이끼같은 빵조각을 뜯어먹었다꿈은 왜 자꾸 시려오는가내 귀는 아직도 물속에 잠겨 있는지뒤돌아보면물안개 자욱한 마을
그 순간 누군가 문고리를 흔든다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인가 아닌가나는 짧게 얘기하고 짧게 대답하였다그의 이면을 살피는 건 그림자뿐마음의 문이 다시 닫히자더 많은 어둠이 거실로 들어왔다나는 그들을 물리칠 수 없었다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술안주로 티브이를 보며커튼 사이 새벽이 젖어들기까지그들은 오랫동안 친구처럼나와 마주했다어둠의 뒤꽁무니가 보일 때까지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전장석 시인 / 서울, 딜쿠샤
* 그가 왜 거기서 허름했는지, 묵시默示가 쥐들을 불러들이고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폐허로 자라온 비문碑文 외벽 없는 바람에 안부를 의탁한 적 없다 그는 애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이었고 커다란 은행나무 때문이었고 벽안의 신혼부부가 살던 보금자리였으므로
* 이역에서 금맥을 찾던 알버트는 어느 날 낡은 타자기에 제 삶을 굴착하기 시작했다 바윗덩이 같은 어둠에 짓눌린 나라 캄캄한 갱도 속에서 길을 잃은 식민들 그의 타자기는 한동안 멈추지 않았고 외신이 전한 그날에야 그가 사라진 이유처럼 모든 일들이 명백해졌다
* 알버트 부부가 살던 붉은 벽돌집은 아내의 목에 걸어준 호박목걸이를 기억하듯 러크나우 궁전의 맹세를 떠올리듯 망각의 세월로 다져온 그들의 꿈을 오롯이 지켜온 이 땅의 또 다른 주인이 살고 있었고
* 몇 백 년 후의 일들을 예감했기 때문일까 장군이 심은 은행나무는 나날이 비장했다 노란 잎들이 마당에 암호처럼 쌓이자 알버트는 마침내 함성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낮달처럼, 장군의 눈썹은 높이 휘날리고
* 자신의 요람 밑으로 불쑥 선언서가 들어오자 울음을 멈추던 갓난아기는 어느새 노구가 되어 아버지의 유언장을 펼쳤다 알버트 테일러가 이 땅에 남긴 단 하나의 문장- 갑옷의 은행나무는 끊임없이 은행잎을 피우고 붉은 벽돌집엔 달빛이 은은하리라
* 양화진 묘지에 잠든 알버트 부부는 자신들의 비문에 새긴 마지막 문장을 고치고 있다 강변의 물살처럼 눈을 감을 수 없네 햇살이 너무 눈부셔 노래를 멈출 수가 없네 그의 헌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므로
전장석 시인 / 별 굽는 나무
나무에게 물었다 내 다음 생(生)이 어디냐고
나중에야 알았다 나무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내가 어느새 숲길을 따라 걷고 있음을
대한민국 모든 시인에게 물었다 전생(前生)이 무엇이었냐고
시인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 숲길 더 걷다 보면 세상의 모든 근심 노랗게 활활 불 질러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별을 굽는 나무들
전생(前生)이 무엇이었냐고 더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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