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근 시인 / 종점 근처
지하도 주둥이를 빠져나오자 얇은 여자 하나 나를 가로막았다 여자의 텅빈 눈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고,
저랑 얘기 좀 하실래요? 아뇨 그럴 생각 없어요 그저 잠시만 함께 있으면? 같이 자는 건 어때요?
외눈박이 가로등이 몇 번인가 노란 눈을 검벅거렸다 자세히 보니 여자는 그림자를 달고 있지 않았다
왜 하필 저죠? 이곳엔 당신 말곤 아무도 없으니까요
비좁은 계단으로 여자는 나를 데려갔다 내가 어두워지자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진 손으로 여자가 내 팔목을 잡았다
저...... 도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요?
잽싸게 나는 여자를 구겨 후미진 골목에 버렸다 적어도 나는 그 얇은 여자를 찢어버리진 않을 것이다
김근 시인 / 손 하나가
손 하나가 왔네 차가운 손 손 하나만 황급히 목덜미를 만지고만 간 가기만 가고 본 적은 전혀 없는 손 하나가 왔네 오긴 왔는데 오자 여태 그때의 손자국 남아 있는지 목덜미 서늘해지고 소름 번지고 손 하나가 간 뒤 온몸을 내내 꺼끌거리게 하던 기분 무엇이었을까 털어도 씻어도 사라지지 않던 그 기분은 손 하나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살펴도 손 하나는 손 하나일 뿐 손 하나에는 그때의 목덜미도 남아 있지를 않는데 그때의 목덜미는 오직 목덜미만이었나 그때의 목덜미는 그때에만 목덜미였나 그때의 목덜미는 목덜미이긴 했나 아니 있었다고 말할 수나 있나 그때 목덜미는 어떤 표정도 손 하나는 보여주질 않네 어떤 손금도 오로지 차갑기만 차가움만이 제 모든 것이라는 듯 차가움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요히 차갑네 놓여만 있고 온통 입김이 가시질 않던 방의 차가움 속에서 머뭇거리며 움직이던 손 입김으로만 가득 채워지던 어둠을 더듬거리던 손 하나 한번도 만져진 적 없던 몸과 터럭 한올까지 속속들이 만져지던 몸 사이에 덜덜 떨며 지나치게 살아난 손끝의 감각으로나 비로소 손인 줄 알던 손 볼 수는 없던 손 하나가 어느 몸에서 어느 몸으로인지도 모르게 그만 몸은 떼어버리고 거기서 여기로 왔나 하며 손 하나 다시 살펴도 손 하나 말이 없고 입술을 꽉 다문 채 눈보라 속에서 손 하나 따라간 적도 있었네 있었다고는 해도 실은 발자국에 발자국을 되찍으며 가고만 있었는데 손은 외투주머니 속에 숨어버려 있다고만 짐작될 뿐 있었는지 없었는지 자꾸 눈보라만 눈을 가리고 있었다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게 지워지기만 안 보이기만 찾을 수 없어 손 하나 영영 나도 지워지는 안 보이는 기분이었는데 차가움만 선명히 남아 손도 없이 내 목덜미를 만지고 갔나 그때 가서 지금 내게로 왔나 하는데 손 하나 움직이질 않네 무언가 만졌다는 기척도 없이 무언가 안 만졌다는 사정도 없이 놓여만 있고 여전히 목덜미에 소름 가시질 않고 꺼끌 꺼끌만 거려 거리는데 손의 주인도 나도 찾을 수 없네 마주한 적 없네 손 하나와 목덜미 끝내 서로 날은 점점 어스름 속으로 말도 길도 희미해지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서상만 시인 / 바람의 연서 외 1편 (0) | 2026.02.15 |
|---|---|
| 문화빈 시인 / 모자 외 1편 (0) | 2026.02.15 |
| 최지온 시인 / 색깔 놀이 외 1편 (0) | 2026.02.15 |
| 신이인 시인 / 거짓말 외 1편 (0) | 2026.02.15 |
| 코샤박 시인 / 표정 외 1편 (0) | 2026.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