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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희숙 시인 / 따뜻한 평등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24.
김희숙 시인 / 따뜻한 평등

김희숙 시인 / 따뜻한 평등

 

 

봄날 햇살은 불평등하다

편의점 앞 햇살 빨갛게 익은

플라스틱 의자 몇 개 놓여 있다

어느 때는 서로 포개져 있었다

의자 속에 또 의자

쓰러지지 않게 서로 앉혀놓고 있었다

의자들의 노동조합 같다

존재들에겐 서로 안거나 앉힐 수 있는

무한한 단결권들이 있다

오늘은 그 의자에 앉았다

따뜻했다, 평등한 의자들

파라솔 둘레에 둘러앉아 햇살 깔아놓고

무료한 시간 부스럭거리다보면

이 빨간 평등의 따뜻함을 알게 될 것이다

이쪽에서 들어 저쪽으로 옮겨놓아도

불평하거나 한 쪽이 주저앉기 마련이지만

이음새도 없고 볼트 하나 없지만

저렇게 일체로 휴식으로 완벽하다

어떤 자리를 탐내려면

저 정도는 돼야 자리다

자리를 털면 햇살 툭툭 털리는 자리

미련 없이 두고 갈 수 있어야 좋은 자리다

 

-시집 『곡물의 지도』 2017. 시와표현 시인선

 

 


 

 

김희숙 시인 / 빈곳에는 빈틈이 없다

 

 

아직도 손바느질을 고집하는

늙은 수전법,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바늘에

어떤 틈이 있어

그 틈의 길이로 혹은 굵기로

옷 한 벌을 뚝딱 지으신다

실눈이 무수히 박혀야 하는 아주 작은 틈이

옷을 짓는다는 것을 알았다

 

옷들에는 얼마나 많은 틈이 있다는 것일까

여미면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틈 한 벌

빈곳에는 빈틈이 없다

 

어머니와 옷감 사이엔

계절을 엇갈리는 바느질법이 있다

추위를 덧대면 여름이고

더위를 덧대면 겨울의 두툼한 옷이 된다

말하자면 어머니는 우리에게 빈틈을

자잘하게 메워 추었던 것이지만

 

어쩌다 큰맘 먹고 낸

빈틈이 없었다면 옷도 나도 없었다는 것

 

빈틈들이 생기고 빈틈들이 메워지면서

사라지는 보이지 않는 틈

그 빈틈을 찾는 어머니의 눈에도

미세한 빈틈이 보이지만 그래도

내 옷에는

무수한 질눈이 따뜻하게 들어있다

 

-월간 <시와 표현> 2018년 11월호

 

 


 

김희숙 시인

1958년 광주광역시에서 출생. 간호대 졸업. 2011년 월간 《시와표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곡물의 지도』, 2017년 세종우수도서선정. 『온몸을 흔들어 넋을 깨우고』. 〈시와 표현〉 편집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