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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 시인 / 따뜻한 평등
봄날 햇살은 불평등하다 편의점 앞 햇살 빨갛게 익은 플라스틱 의자 몇 개 놓여 있다 어느 때는 서로 포개져 있었다 의자 속에 또 의자 쓰러지지 않게 서로 앉혀놓고 있었다 의자들의 노동조합 같다 존재들에겐 서로 안거나 앉힐 수 있는 무한한 단결권들이 있다 오늘은 그 의자에 앉았다 따뜻했다, 평등한 의자들 파라솔 둘레에 둘러앉아 햇살 깔아놓고 무료한 시간 부스럭거리다보면 이 빨간 평등의 따뜻함을 알게 될 것이다 이쪽에서 들어 저쪽으로 옮겨놓아도 불평하거나 한 쪽이 주저앉기 마련이지만 이음새도 없고 볼트 하나 없지만 저렇게 일체로 휴식으로 완벽하다 어떤 자리를 탐내려면 저 정도는 돼야 자리다 자리를 털면 햇살 툭툭 털리는 자리 미련 없이 두고 갈 수 있어야 좋은 자리다
-시집 『곡물의 지도』 2017. 시와표현 시인선
김희숙 시인 / 빈곳에는 빈틈이 없다
아직도 손바느질을 고집하는 늙은 수전법,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바늘에 어떤 틈이 있어 그 틈의 길이로 혹은 굵기로 옷 한 벌을 뚝딱 지으신다 실눈이 무수히 박혀야 하는 아주 작은 틈이 옷을 짓는다는 것을 알았다
옷들에는 얼마나 많은 틈이 있다는 것일까 여미면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틈 한 벌 빈곳에는 빈틈이 없다
어머니와 옷감 사이엔 계절을 엇갈리는 바느질법이 있다 추위를 덧대면 여름이고 더위를 덧대면 겨울의 두툼한 옷이 된다 말하자면 어머니는 우리에게 빈틈을 자잘하게 메워 추었던 것이지만
어쩌다 큰맘 먹고 낸 빈틈이 없었다면 옷도 나도 없었다는 것
빈틈들이 생기고 빈틈들이 메워지면서 사라지는 보이지 않는 틈 그 빈틈을 찾는 어머니의 눈에도 미세한 빈틈이 보이지만 그래도 내 옷에는 무수한 질눈이 따뜻하게 들어있다
-월간 <시와 표현> 201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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