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 시인 / 빅볼 나는 지금 공 없는 공놀이를 하고 있다 빅볼을 만들고 빅볼이 통로를 따라 이동하고 빅볼이 떨어지고 빅볼을 포장하고 컵에 담긴 빅볼이 레일을 타고 로봇실로 들어간다 작고 둥근 지구가 얼음컵 안에 들어 있다 빅볼의 깨어진 틈으로 빛이 스며든다 우리는 그것을 무지개라 부른다 빅볼 안에 비춰진 사람들은 왜 모두 여자일까? 카자흐스탄, 몽골, 베트남, 조선족, 우즈베키스탄, 태국인들이 제각각 제 나라말을 하면서 모여 있다 에바, 마기, 네네, 젬마, 비카, 누네....... 우리 마귀, 마고, 미카, 삐가, 누에......라고 낄낄대면서 너희들 이름은 발음하기가 참 어렵구나 우리는 서로 모른 채 거대한 빅볼이 되어 간다 얼음이 깨어진 틈으로 무수히 갈라진 우리가 보인다 온 세상이 빅볼인데 그곳이 어디인지 가본 것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빅볼에 비춰지지 않는 세계는 어떨까? 우리는 빅볼에 혀를 갖다 대어본다 빅볼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누군가는 언더그라스에 빅볼이 담긴 위스키를 마시겠지만 빅볼에 비친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루 종일 마주 보는지도 모른 채 마주 보았다 컴 안에 들어 있는 저 빅볼을 잡을 수가 없다 컵 안에 공처럼 고요하게 떠 있다
-시집 <밤이 부족하다>
이은 시인 / 밤이 부족하다 2 알바몬에는 밤이 가득합니다 어딘가를 찌르면 밤이 쏟아질 것 같은데 헐벗은 빔이 부족합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차가울까 봐 양손에 장갑을 끼웁니다 야간 알바 자리를 찾아 헤맵니다 손이 남아도는데 밤이 부족합니다 일손을 찾아서 걷습니다 야간조의 밤이 부족합니다 맥도날드 문 앞을 서성이다 면접 신청을 하고 돌아가는 길 일주일에 한 번 햄버거 세트를 준다는 말에 잠시 얼굴이 화사해졌습니다 햄버거는 나에게 빨간 포장에 싸인 핏줄 같습니다 베이컨이 들어 있는 햄버거는 동그라미 속에서 부동의 자세입니다 그것들이 그림 속에서 웅크리고 있습니다 나에게 의무를 다하고 죽은 동물들의 기관들이 꿈틀거립니다 빨간 포장지에 싸인 베이컨입니다 밤의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일 오전에 면접 오시겠어요? 나이가 몇이죠? 밤이 내민 손이 넉넉한데 나는 주저합니다 죄송하지만 나이 제한 없다고 올려저 있던데요 나는 오늘 밤 잠들 생각이 없습니다 엄마의 등에서 처음 본 달이 저런 둥글게 떠 있는데 나부끼는 것들은 여전히 나부낍니다 맥도날드에 동그라미를 팻말처럼 세워놓고 답을 기다립니다
-시집 <밤이 부족하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강운자 시인 / 진검승부 외 2편 (0) | 2026.02.24 |
|---|---|
| 박시하 시인 / 진료실에서 외 1편 (0) | 2026.02.24 |
| 김언희 시인 / 당신의 얼굴 외 1편 (0) | 2026.02.24 |
| 정재분 시인 / 나의 기타 외 1편 (0) | 2026.02.24 |
| 김희숙 시인 / 따뜻한 평등 외 1편 (0) | 2026.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