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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봉학 시인 / 돌의 노래
무너진 성벽의 돌 하나 주워와 책상에 올려놓고 그의 노래를 듣는다 세상살이 과묵하게 지켜왔던 터라 그의 노래는 저음이며 바리톤이다 눈 딱 감고 듣는 그의 노래는 천 년의 천 년을 두고 발효된 소리 비이다가 안개이다가 천둥이다가 번개이다가 절규가 된다 고대의 고대 때부터 돌로 쌓은 성벽은 무너지곤 했다 허물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막기 위해 쌓은 것이라 돌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은 구르기 위해 생겨난 것 돌의 자유를 속박하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성벽을 쌓았는가 두텁게 쌓을수록 돌은 심장이 멎고 노래를 멈춘다 그를 자유롭게 풀어준 강물에 물어보라 그가 구르며 부르는 노래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책상 위에 놓인 돌에서 나는 환청을 듣는다 지층 깊은 곳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그의 환상곡을 듣는다
황봉학 시인 / 주흘산 달빛을 보다
가장 음기가 강한 보름날이면 여인이 머리를 풀고 하늘 향해 누운 주흘산에는 달빛이 내린다 달빛은 주흘의 가장 그늘져 음산한 곳에 박새를 심고 서슬 푸른 이슬을 뿌려놓고는 떠난다 고라니를 잡아먹던 표범도 떠나고 멧돼지를 잡아먹던 호랑이도 떠난 새재에는, 이제 달빛이 최상위의 포식자가 되어 흰 눈이 내리면 흰 눈을 잡아먹고 찬서리가 내리면 찬서리를 잡아먹는다 매섭고도 추운 동짓달 보름날 밤에 나는 온 산을 뒤덮은 상고대를 잡아먹는 달빛을 보았다 그날, 달빛의 송곳니는 유난히도 희고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아마도 주흘산 여인의 산고가 가까워졌는지 문경 땅 곳곳에 청사초롱이 길을 밝히고 주흘산 달빛의 눈에는 잠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겠다는 푸른빛의 결의가 호랑이의 포효처럼 흐르고 있었다
-2021년 [백화문학] 제49집 발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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