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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 시인 / 원고지의 힘
원고지를 놓고 막상 책상에 앉고 보니 무엇을 쓸 것인가 그대에게 못다 한 진정의 편지를 쓸까 하늘에게 사죄의 말씀을 쓸까 달리의 늘어진 시간에게 안부나 물을까 막상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 지난 여름 내게만 사납게 들이치던 장대비가 원고지 칸과 칸 사이를 적시고 목적지도 없는 폭풍의 기차가 지나간다 기차가 끌고 가는 기―인 강물 위 빠져 죽어도 좋을 만큼 깊고 푸른 달이 반짝 말라비틀어져 비로소 더욱눈부신 은사시나무 잎이 떨어진다 지난 과오가 떠오르지 않아 얼굴 붉히는 밤 수천 마리 피라미 떼가 송곳처럼 머릿속을 쑤신다 눈에 보이지 않아 더 그리운 것들 원고지를 앞에 놓고 보면 분명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 그 전부가 그립다
-『분명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에서
고영 시인 / 쓸어내린다는 말
한 사람을 쓸어내린 적 있다
아비가 어미를 쓸어내리듯 기러기가 하늘을 쓸어내리듯 자작나무가 자작나무를 쓸어내리듯 빗자루가 지구를 쓸어내리듯 눈물이 눈물을 쓸어내리듯 쓸어내려야 할 것이 쓸어내려야 할 것들을 쓸어내리고 있다 연못이 파문을 쓸어내리듯 바다가 파도의 가슴을 쓸어내리듯 거짓이 거짓을 쓸어내리듯 밥알이 배고픔을 쓸어내리듯 기쁨이 슬픔을 쓸어내리듯
쓸어내려서 오히려 더 쓰라린 사람도 있다
ㅡ시집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시인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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