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박승민 시인 / 하류(下流)의 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25.
박승민 시인 / 하류(下流)의 시

박승민 시인 / 하류(下流)의 시

 

 

다가오는 것은 하류의 물결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나를 견뎌준 건

먼 과거의 어느 시간쯤에서 만난

한 순간

 

순간의 화인(火印)

 

이후는 물에 갇힌 수몰주민의 생이었고

때로는 이미 지나가 버렸을지도 모를 어떤 다복(多福)을

나는 무성의하게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루가 습속이 된 이 가죽옷에도

나비의 날개가 헌 눈처럼 부서지고

 

시계를 보지 않아도 다가올 시간을 예감하는 나이

첫 소절만 들어도 노래의 끝을 개괄할 수 있는 나이

임종이 최후의 목적지가 아니어도

알고 보면 모두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은 모두 지나가는 하류의 물결에 지나지 않았다

 

흘러가지 않는 바람이 없었고

머물 수 있는 바람도 없었고

 

 


 

 

박승민 시인 / 버드나무로 올라가는 강물

 

 

등이 퍼렇게 얼어붙은 배(腹) 밑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파랑은 또 물컹, 물컹 흘러간다.

같은 몸이지만 다른 표정으로

 

한때, 밭에서 막 뽑아낸 배추 포기처럼 푸른 시절이 우세한 적 있었지만

폐나 위장 내 기억의 일부는 수장고 속에서 죽었거나 죽어가는 중

아침마다 썩은 구취가 장롱 가득, 하품하는 입으로 아침 해가 들어온다.

 

몸이란, 죽은 시간과 살아 있는 시간이 겹치면서

서로 충돌하면서 그 무엇으로 살아가는 수로(水路).

어두워지는 한복판에서 빛을 오래 잡고 허물어져가는 물의 반짝이는 등을 본다.

 

죽은 몸이 푸른 봄을 허공에 걸어놓았다.

살아 있는 작은 잎이 관(棺)을 뚫고 시퍼런 꼭대기까지 삶을 끌고 간다.

 

 


 

박승민 시인

1964년 경북 영주 출생. 숭실대 불문과 졸업.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지붕의 등뼈』 『슬픔을 말리다』 『끝은 끝으로 이어진』. 2016년 제2회 <박영근작품상> 과 동년 <가톨릭문학상>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