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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소은 시인 / 안반데기
한 사내가 산비탈 안개 속에서 무릎을 꿇고 배추포기를 세웠다 내려앉은 마음을 묶어두고 고랭지 한파 같은 사내의 심장이 차갑다
이 계절도 저 계절도 이젠 소용없는가 봐 뜯어내고 갈아엎어도 자꾸 돋아나는 신음소리
어느 날 친구가 돈 좀 가진 게 있느냐고 물어왔다 야, 나도 요즘 배춧잎 보기 힘들어 비탈밭에서 몸이 기울 듯
우리는 팔리지도 못한 배추처럼 비탈에서 중심을 잡으려고 애썼다 떨어져서 서로가 서로에게 쓰러지며 안부를 전했다
푸른 배춧잎들이 죽을힘을 다해 안반데기 바람 앞에서 떨고 있는 사이 안개가 몰려왔다 지겨운 것들을 덮어버리기라도 하듯
올해도 사내의 밥상은 끼니마다 배춧국이 올라왔다 사내가 지나갈 때마다 옷에서 푸른 기운이 돌았지만 여전히 배추밭은 안개 속에서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양소은 시인 / 삼두리 동백꽃
해조음이 꽃을 부려놓았어. 해안선 따라 고향 방문을 환영합니다 현수막이 출렁이고 있었지. 명절이면 윤기 나던 툇마루 문지방 누런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얼굴들. 손때 묻은 꽃무늬 바지는 저녁 불빛으로 짠맛이 더 진하게 배었어. 아랫목에서 윗목으로 옮겨 누운 자식들에게 꽃이 되고 싶었던 어머니. 식모살이 가던 자식 따라 동백 몽우리가 붉었어. 바다에 가라앉은 폐교 종소리가 파도에 더 크게 울렸지. 손짓이 꽃씨처럼 흩어지고 발자국들이 눈발처럼 떠다니던 골목들. 명절의 귀향은 끈질기게 다시 돌아오고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함께 오가는 길목에서 동백은 새끼 고양이 울음처럼 오지게 떨어졌어. 그렇게 해마다 진저리치며 동백꽃은 피었지.
*삼두리 : 완도군 군외면에 있는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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