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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은심 시인 / 추억의 연장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25.
이은심 시인 / 추억의 연장전

이은심 시인 / 추억의 연장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습관적으로 걷어차이는 공이 비에 젖어 떨고 있다

 

오직 그리움의 방향으로만 내달리는 내 습관도

골대 밑 작은 발자국들과 함께 젖는다

 

던지고 받아 안으면서

지는 쪽만 응원하다 목이 쉰 응원가처럼

 

먼지 위를 굴러도 그게 사랑이라고 네가 떠난 후에야 누가 일러주었다

 

담을 넘어 기어이 가버렸으면

가다가 돌아왔으면

반반으로 나뉜 마음은 사나흘쯤 증발되었다가

반드시 돌아와 유리창을 깨고 좌충우돌

 

승부가 뻔한 이 싸움터의 후미진 곳에서

너도 나처럼 바람 빠져 있는 게 아닐까

 

날자마자 떨어지는 털 빠진 독수리의 궁리가 허공에 목을 매고 고단한 건 아닐까

 

열광과 야유를 굴려온 운동장엔 어디를 빗맞고 멀리 가던 중이었는지

여기로부터 사라지는 중이었는지

악수를 나눈 추억이 주춤주춤 지워지고

 

걷어차고 후련해진 운동장 구석에서

누구지 누구지 그냥 지나치고서야

 

너와의 추억엔 연장전이 없음을 알았다

 

-시집 <바닥의 권력> 황금알

 

 


 

 

이은심 시인 / 가치전도의 세계상

 

 

새벽은 어둠이고 밤은 빛이다

하늘은 무겁고 땅은 가볍다

컴은 넓고 세계는 좁다

 

아이가 어른을 가르친다

신도가 스님을 이해한다

왕이 하인을 업는다

 

빚이 저축을 이긴다

물정이 인정이다

뇌물이 꿈이다

 

문명이 자연을 낳는다

로봇이 사람을 지시한다

꼼수가 대의를 노래한다

 

오락이 학문을 비웃는다

성자가 세상을 따른다

꼬리가 머리를 움직인다

 

웃물은 흐리고 바닥물은 맑다

벗는 것이 입는 것이다

거짓이 사실을 덮는다

 

 


 

이은심(李恩心) 시인

1950년 대전 출생. 한남대학교 영어영문과 졸업. 1995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2003년 『시와 시학』 신인상 수상. 시집 『오얏나무 아버지』 『바닥의 권력』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 2017년 대전문화재단 문학창작기금수혜. 2019년 대전일보문학상 수상. 2019년 한남문학상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현재 <시몰이> 동인. <대일문학회> 동인. <금강시마을>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