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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기택 시인 / 오래된 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25.
김기택 시인 / 오래된 땅

김기택 시인 / 오래된 땅

 

 

살갗 밑으로 푸른 뿌리들 지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팔뚝에서 손등으로, 목에서 이마로

가지 치며 뻗어가고 있습니다.

거죽 밖으로 나오려고 굵은 뿌리를

살가죽이 간신히 누르며 덮은 곳도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눈알도 붉은 잔뿌리들이 움켜쥐고 있습니다.

 

살도 오래된 땅이라는 듯

비바람에 패이고 그 주름고랑으로 땀 흘러내리고

그 위로 들풀 같은 털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습니다.

따뜻하고 물컹물컹한 살은 안에 감추고

거죽은 황야처럼 한껏 질겨지고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발바닥을 부드럽게 받았다가 밀어내는 흙길처럼

손바닥 닿는 자리에 두툼한 주름살이 만져집니다.

쭈글쭈글하다는 건

살가죽과 속살 사이에 팽팽하던 공기가 빠지고

그 자리에 허공이 가득 들었다는 것이겠지요.

 

 


 

 

김기택 시인 / 다리 저는 사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꼿꼿하게 걷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춤추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앉았다 일어서듯 다리를 구부렸고

그때마다 윗몸은 반쯤 쓰러졌다 일어났다.

그 요란하고 기이한 걸음을

지하철 역사가 적막해지도록 조용하게 걸었다.

어깨에 매달린 가방도

함께 소리 죽여 힘차게 흔들렸다.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하여

온몸이 다리가 되어 흔들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기둥이 되어 우람하게 서 있는데

그 빽빽한 기둥 사이를

그만 홀로 팔랑팔랑 지나가고 있었다.

 

 


 

김기택 시인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중앙대 영문과 졸업. 경희대학교대학원 국문과 박사.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등단.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등.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 제6회 지훈문학상. 상화시인상.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