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진옥 시인 / 걷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26.
이진옥 시인 / 걷다

이진옥 시인 / 걷다

 

 

산이 걷고

물이 걷고

 

새는 날갯짓으로 걷고

물고기는 꼬리로 걷고

꽃은 향기로 걷는다

 

걷다가 지친 구름은 때로 울기도 하고

 

나무는 푸르름을 안고 걷고 또 걷고

 

숲은 열매의 시간을 향해 말없이 걷는다

 

내가 걷고

네가 걷고

우리는 저마다의 보폭만큼 걷고 있는데

속도를 놓아버린 세월은 뛰고 있다

 

 


 

 

이진옥 시인 / 신발에서 벗어나는 일

 

 

 울창하지만 텅 빈 밤

 불빛에 이끌려 맨발로 나섰어요

 어느새 난 흔들리는 파도에 몸을 맡기죠

 내 말 좀 들어봐요 들어보라니까요

 외면하는 섬과 섬 사이로 떨어진 말이 떠다니고

 쏟아지는 빛의 비명이 몸을 찔러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그림자 무성해요

 

 평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안 신발에 갇힌 발뒤꿈치의 비명이 굳어 화석이 되어가는 걸 외면했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면 신파라고 화를 낼테죠

 알아요 섬과 섬 사이를 떠돌며 할 말은 아니죠

 어무렴 어떤가요

 난 이미 두려움 없이

 비 오는 거리를 맨발로 걸으며

 불빛이 차갑게 발을 더듬어도

 시린 내 발을 연민하지 않아요

 하지만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물끄러미 물끄러미

 물끄러미가 어느새 새벽을 몰고 오네요

 맨발의 새벽을

 

 


 

이진옥 시인

경북 안동 출생. 2010년 《예술가》를 통해 등단. 예술가작가회 회장. 군포예술 편집위원. 시민문학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