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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15159

이규정 시인 / 생일이 없던 겨울 이규정 시인 / 생일이 없던 겨울 생일이 한나절인 사람은 저녁까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사람이다. 저녁노을이 어떻게 편집 되고 사라지는지 모른다. 주물러서 만든 얼굴은 웃음도 빨리 녹는다. 그 웃음이 창문이 되었을 때 햇볕을 갈아 끼워가며 녹지 않은 얼굴을 꿈꿨다, 눈썹을 만들.. 2019. 3. 11.
박인하 시인 / 나는 아직 처녀예요 박인하 시인 / 나는 아직 처녀예요 나를 믿는 일이 중요했어요. 사람들이 나를 숭배하던 지난날 축제에서 나는 지상의 가장 높은 자, 붉은 의상이 깃발처럼 펄럭이는 행렬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축제였지요. 난 준비된 살아있는 여신 내 몸은 그 흔한 점 하나 상처 하나 없는 흠 없는 몸, .. 2019. 3. 11.
한정원 시인 / 햇빛 소리 외 1 한정원 시인 / 햇빛 소리 햇빛이 유리를 통과할 때 거미줄 치는 소리가 들린다. 피아노 건반이 여든 여덟 개밖에 없어서 빛의 소리는 들려줄 수 없다는 말을 그가 왼발 안쪽 발꿈치로 감아 찬 공이 백 개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갈 때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보는 것 같다는 그 말을 나는 오.. 2019. 3. 10.
류인서 시인 / 안경 류인서 시인 / 안경 안경을 어항이라 말하는 늙은 소년이 있다 그는 여기다 송사리와 갈겨니 버들치 치어들을 키운다 살얼음 낀 들판과 초겨울 거리의 꽃배추도 키운다 그의 어항은 새장도 자전거도 아니지만 부엉이나 백일홍, 사막의 달까지 그가 몰래 키우는지 어떤지는 내가 알지 못.. 2019. 3. 10.
우원호(禹原浩) / 神은 죽었다 우원호(禹原浩) / 神은 죽었다 「神은 죽었다」라는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1883∼1885]의 도발적인 명제는 명징하다 구약성서 〈창세기〉편의 우주를 창조한 조물주(造物主)로 기록된 그는 신격화(神格化)된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며, 神은 눈먼 선지자들이 눈먼 숭배자를 문고리.. 2019. 3. 10.
천수호 시인 / 회귀선 외 1 천수호 시인 / 회귀선 모래 위에 그려진 정교한 꺾은선 그래프 파도의 망설임은 침엽수 산 능선처럼 가파르다. 저토록 수위 조절이 힘든 사랑의 한 시절이 있었지만 어떤 선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대는 갔다. 무릎을 꺾었다가 새로 일어서는 저 파도소리처럼 그 사랑은 또 다른 사랑에게 .. 2019. 3. 9.
이영춘 시인 / 수평의 힘 이영춘 시인 / 수평의 힘 나는 수면 속에 물고기처럼 잠겨서 나를 건져 올리지 못하네 빗방울 속으로 흐르는 여린 풀잎들이 슬픈 레퀴엠의 악보처럼 뛰어오르는데 요만큼만 차 오른 물결처럼 내가 허공 속으로 자꾸 점프를 해도 내 그릇은 요만한 크기의 빈 공기 내 창밖에서 유리창을 두.. 2019. 3. 9.
김신혜 시인 / 누에고치 누에고치 김신혜 시인 비료를 먹고 환해지고 있다 더부룩한 기분에 휩싸여 움직일 수 없다 자기 몸집만한 상자에서 웅크린 채 자고 있는 개 한 마리 일인분의 기분 이 광택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탈피를 부추긴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달라붙은 번데기들처럼 껍질.. 2019. 3. 9.
류인서 시인 / 거미줄 2 류인서 시인 / 거미줄 2 골목을 공기우물이라 부르는 마을이었다 골목을 무한꽃차례라 부르는 창문이었다 이슬을 모으는 사유지의 우편낭 나무가 없는 들판으로 도착하는 나비들 골목은 골목에서 간신히 놀고 있네 소실점을 얼굴에 둔 그림처럼 눈동자 안으로 흔들리며 걸어가는 골목들.. 2019. 3. 8.
김려원 시인 / 식물성 단어 식물성 단어 김려원 시인 한 권 노트에 식물성 단어를 가리지 않고 심었다 제목을 ‘풀밭’ 이라고 세웠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식물성 단어로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어제 들은 말이 저만치 자라있으니 내가 한 대답에서는 빨갛거나 노란 변명이 피어있을 거다. 모든 대화는 과정일 .. 2019. 3. 8.
권순해 시인 / 개심사 개심사 권순해 시인 계곡이 소리를 닫고 칩거에 드네 새들도 날개를 접고 묵언 중이네 해우소 옆 단풍나무 잎은 제 마지막을 태우며 불온한 문장들 지우고 있네 옷을 벗은 배롱나무는 연못에 비친 저를 깊이 들여다보네 나무에 걸린 구름을 배경으로 쑥스러운 웃음을 주고받으며 잠깐 붉.. 2019. 3. 8.
이규리 시인 / 모래시계 이규리 시인 / 모래시계 뒤집어지지 않으면 나는 그를 읽을 수 없어. 뒤집어지지 않으면 노을은 수평선을 그을 수 없어. 그리고 무덤은 이름들을 몰라. 폭우가 유리창을 딛고 지나가면 장면들은 뒤집어지지 편견은 다시 뒤집어지지 간절히 간곡히 전심으로, 이런 건 더욱 더 뒤집어지지 .. 2019.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