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수도회 창설자편 /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by 파스칼바이런 2009. 7. 10.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수도회 창설자편 /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상)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님」이라는 말을 삶속에서 온몸으로 실천했다.

 

온몸으로 가난한 이를 사랑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창립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가난영성 깨달아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지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 눈앞에서 흘리는 땀과 희생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와 「선교 사제회」 창설자인 빈첸시오 아 바오로(1581∼1660)는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님」이라는 말을 그대로 삶 속에 옮기면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사람 안에서,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남을 온몸으로 설파한 인물이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1581년 4월 24일 프랑스 남서부 랑드 지방에 있는 닥스시 근처 프루이(Prouy)에서 가난한 농가의 6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의 16세기 후반 프랑스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도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1562년부터 1598년 사이에 벌어진 8차례의 종교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하고 경제를 도탄에 빠뜨렸으며 세금은 천정부지로 높아 대부분 국민들의 삶은 비참함 그대로 였다.

거지들은 들끓고 많은 농부들은 가난해져 가는 상황이었지만 세금 착취로 귀족들은 계속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고 그런 만큼 빈부 격차는 극심하게 벌어졌다.

 

한편 교회는 부유한 사람들 편에서 부유함과 영향력을 보이던 시절이었다.

개혁을 위한 트리엔트 공의회 결정 등은 거의 실현되지 못했고 특히 사제들을 위한 교육이 빈약했다.

많은 이들이 실망하고 교회에 신뢰심을 갖지 못했으나 그에 반하여 보다 하느님께 충실하려는 종교적 운동들이 생겨나기도 했고 이것은 화려한 성당들이 많이 지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삶은 이같은 시대적 배경에 대해 보다 큰 이해를 전제로 한다. 넉넉지 않았던 가정, 또 살았던 지역조차 빈곤하고 척박한 곳에서 태어난 빈첸시오는 살림살이 뿐 아니라 지역 주민 절반 이상이 글을 읽거나 쓸줄 모르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농부들의 삶과 가난을 알게 됐고 그 경험은 향후 삶 전체에 대단히 큰 척도가 됐다.

 

14세가 되었을 때 인근 닥스(Dax)의 프란치스코 회원들에게서 학업을 시작했던 빈첸시오는 2년후 툴루즈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다음해 투르브 주교좌성당에서 부제품을 받고 20살이 되던 1600년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교육자, 자선 사업소, 관리인, 본당 신부 등 일을 거치며 사목자로서 사회 내 다양한 계층을 만나게 됐고 귀족들의 화려함과 동시에 가난한 이들의 비참과 곤궁을 목격했던 그는 1610년경 프랑스에 오라토리오회를 설립 하러온 삐에르 드 베륄 신부를 만나게 됐고 그로부터 공디 백작의 전속 사제 겸 가정교사 일을 제안 받았다.

 

공디 백작 부인의 교사일과 함께 백작집의 하인 소작인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던 빈첸시오는 이때 다시금 시골 사람들의 영적 물질적 빈곤을 목격하게 됐다.

 

베륄 신부 허락으로 그 집을 떠난 빈첸시오는 당시 빈민 지역이었던 리용 근처 샤티옹 레 돔브 읍 본당신부로 부임했고 이곳에서 「애덕회」를 조직했다. 미사 전 본당 내 어려운 이들을 소개하고 신자들이 그 집을 돌볼 것을 요청했던 빈첸시오는 또 신자들이 봉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 규칙을 작성했는데 이것이 곧 애덕회였다.

 

얼마후 공디 백작의 간곡한 청에 따라 자유로운 선교 활동을 조건으로 다시금 공디 백작 집에 입주하게된 빈첸시오는 1625년까지 공디 가문의 전속 사제로 생활하며 여러 마을에서 설교 활동을 벌이는 한편 애덕회를 창설했다.

또 공디 백작이 관리 책임을 맡은 갤리선 죄수들의 비인간적 대우를 개선토록 요청, 갤리선 구호 관리관 직책을 받기도 했다.

 

공디 가문에 머무는 동안 노예들의 생활이 나아지도록 최선을 다했으며 그들을 위한 병원까지 설립하고 영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공디 백작 부인이 사망한 후 빈첸시오는 가난한 이들 특히 시골 사람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들의 복음화를 위해 「선교 사제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이 사제회는 당시 사용치 않고 있던 나자로 거리의 나환자 병원인 라자로의 집으로 이사한 후 「라자로회(Lazarists)」로 불렸다.

 

1625년말 빈첸시오는 미망인으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 생활을 하는 루이즈 드 마리악(Louise de Marillac, 1581∼1660)을 알게 된다. 빈첸시오는 지도 신부가 되어달라는 루이즈의 청을 받아들였고 시골 지역의 애덕회 관리를 그녀에게 맡기게 된다.

성직자들을 위한 모임 「화요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30년 전쟁으로 어려움에 처한 파리 주민들과 시골 주민들의 구호 사업에도 헌신한 빈첸시오는 루이즈 친구들의 협조가 늘어나면서 「애덕 부인회」를 설립, 이들이 병원을 찾아 중병에 걸린 환자들과 고아들을 돌볼 수 있는 조직을 마련했다.

 

그러나 한편 귀족과 평민의 신분이 엄격했던 배경에서 상류층 부인들이 중환자를 가까이 하는게 쉽지 않았고 가난한 이들도 그들의 시중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런 배경에서 수녀회 창립을 결심한 빈첸시오는 루이즈에게 신심 깊은 처녀들을 찾도록 부탁했고 마침내 봉쇄수녀회와는 다른 수녀회를 창설했다.

바로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의 시작이었다.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수도회 창설자편 /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하)

 

(그림설명) 루이즈 드 마리약에게 버려진 아이를 맡기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

 

활동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

 

병자·빈자 있는 곳이 곧 수도원

자기 중심 떠나 복음실천 강조

 

빈첸시오 아 바오로가 창립한 ‘선교 사제회’ ‘라자로회’와 ‘애덕의 수녀회’, 즉 현재의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는 당시 교회 상황을 감안할 때 매우 파격적인 형태였다.

 

라자로회는 도시에 비해 사목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있는 농촌 신자들을 찾아 교육을 시키고 성사를 집행했으며 성직자들의 재교육이 부족한 처지를 인식하고 사제 교육에도 노력을 쏟았다.

 

이같은 노력을 통해 빈첸시오는 아무리 신학적 지식이 많더라도 헌신적인 생활과 기도 생활을 하지 않을 때 성직자들의 복음화 노력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식시키며 사제들의 생활 쇄신에 기여했다.

 

특히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출현은 여성 수도자들이 수녀원 담밖을 넘어 활동을 펼치는 새로운 모습을 가져왔다.

 

당시에는 사회복지 활동을 하는 수도회 보다 관상 생활을 하거나 혹은 학교를 운영하는 수도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는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이 있는 곳을 수도원으로 삼았다.

즉 수도자의 정신으로 살아가지만 수도복 수도원에 틀을 두기보다 「이웃 사랑 실천」이라는 본질적인 업무에 몰두했다.

 

빈첸시오는 수도자들에게 『여러분에게 수녀원으로는 병자들의 집과 장상이 있는 집이 있고 여러분의 보호 지역으로는 도시의 길이 있고 봉쇄로는 순종이 있으며 서원으로는 하느님 섭리에 대한 한결같은 신뢰심이 있습니다』고 강조했다.

 

사실 빈첸시오는 수녀들이 수도원 아닌 현장에서 사도직을 실천하는데 대해 적잖은 신중함을 기했다.

젊은이들이 과제로 삼고 있는 일을 수행하는데 수도원의 담이 방해가 될 수 있음도, 또 교회 장상이 봉쇄 구역을 가지지 않은 수녀회에 선입견을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을 감지하면서 프란치스코 드 살이 봉쇄 구역을 가지지 않고 사회봉사에 전념하는 수녀회를 창설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경험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빈첸시오는 수도회 회원들이 수도복을 입는다든가 서로를 수녀라고 부르는 것을 삼가토록 했다.

그들에게는 병원이 곧 수도원이었고 수도원 성당은 인근 본당이었고 주변 지역의 길들은 수도원 정원이었다.

또 순종이 수도원의 담이기도 했다.

이들의 과제는 오로지 병자들을 돌보는 것이었기에 병자들이 있는 곳이 곧 수도원이요 소임 장소였다.

 

수도회 관계자들은 『거룩한 겸손이 순결을 지켜주었고 이들의 소명을 지켜준 것은 다른 서원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 섭리에 대한 믿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수도회는 1668년 로마로부터 인가를 받았는데 그 후 상황에 따라 차츰 수도복과 봉쇄 구역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나자로회 및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창립 등을 통해 빈첸시오 아 바오로가 세상에 남긴 것은 「주님을 따르는 삶」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삶을 사는데 있어 항상 하느님 뜻이 무엇인가 알려고 노력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서 자신들의 과제를 찾았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학자들은 빈첸시오의 삶을 「훌륭한 활동가」로서 평가한다.

미리 계획을 세워 그에 맞춰가기 보다는 그때그때 현실적 상황 안에서 시대적 필요성과 그에 대한 적절한 부응책을 즉시 파악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또 그는 조직력을 지녔으면서도 제도 보다는 사람을 중시한 인물이었다.

 

그의 영성은 「활동 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길」로 요약된다.

진정한 신앙은 복음생활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데 있으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사람 안에서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설파했다.

 

여기서 강조한 것은 실천에 있어 자기중심을 떠나 여러 가지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

예를 들어 어떤 자선 사업을 시도하려면 자신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지시를 기다리며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처럼 빈첸시오는 어린이,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 등 가장 가난한 이들 가운데 숨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는데 자신의 전 생애를 봉헌했다.

 

수도회 설립을 통해 육신적으로는 가난한 환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조치를 베풀고 영신적으로는 그들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봉사하는 것을 영성으로 삼고 모든 회원들이 「가난한 자들의 종」이 되기를 바랬다.

기도생활과 활동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애덕의 길을 모색했던 빈첸시오 아 바오로.

그의 정신은 이후 세계 모든 자선의 모범이 되었다.

 

실제로 1660년 그가 사망했을 때 이미 라자로회와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수도회는 프랑스 밖을 넘어 세계 곳곳 많은 나라에 퍼져 나가 있었다.

1737년 6월 16일 교황 글레멘스 12세에 의해 시성됐던 빈첸시오는 1885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됐다.

 


 

축일 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Vincent de Paul)

m0005.asf
0.47MB
m006.asf
0.34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