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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영신수련의 기원으로서의 이냐시오의 영적 체험

by 파스칼바이런 2009. 10. 21.

영신수련의 기원으로서의 이냐시오의 영적 체험

심종혁(예수회 신부/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 신학과 교수)

 

 

 

 

 

들어가는 말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신비주의와 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역동성에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이냐시오의 삶에 있어서 태양과 같은 분으로서 <영신수련>의 궁극적인 촛점이다. 이러한 이냐시오적 그리스도론의 결정적 형상과 그의 영적 체험의 절정은 라스톨타의 비전에서 잘 드러난다.

 

사제가 된 후에도 그는 자신을 준비하고 성모께서 자기를 성자와 한 자리에 있게 해 주시기를 빌면서 일년간 미사를 지내지 않고 보내기로 결심한 바 있었다. 로마를 몇 마일 남겨두고 하루는 어는 성당에서 기도하는데, 그는 자기 영혼에 크나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성부께서 자기를 당신의 성자 그리스도와 함께 한자리에 있게 해 주시는 환시를 보았으며 성부께서 자기를 성자와 함께 있게 해 주셨음을 추호도 의심할 바 없었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피정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참가할 수 있도록” 당신 성자 주님으로부터 은총을 구하라고 초대한다. 우리가 <영신수련>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의 그리스도론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이러한 점은 <원리와 기초>에 담긴 <영신수련>의 정신과 목적이 바로 <그리스도 왕국> 묵상과 <두개의 깃발> 묵상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명확해 진다. <영신수련>의 신학을 밝히고, 특별히 이냐시오 영성의 역동적 생동감 밑에 깔려 있는 교의적 확신을 밝히기 위해서는 <영신수련>에서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위치를 밝혀야만 한다. <영신수련>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일생에 대한 묵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그 목적과 의미가 <선택 과정>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즉 선택의 근본 내용과 동기는 바로 예수의 생애 신비로부터 파생되어야 하며, 특히 <그리스도 왕국> 묵상에서 얻어지는 확신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영신수련>의 역동성을 살피기 위해, <영신수련>과 이냐시오 자신의 영적 체험과의 관계를 다루어 나갈 것이다.

 

 

<영신수련>의 내적 영감으로서의 이냐시오의 하느님 체험

 

살라망카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던 시기인 1527년에 이미 이냐시오는 자신이 지닌 영적지식을 어디에서 얻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물론 이냐시오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했다. 하지만 후에 기록된 [자서전]에서 “하느님께서는 학교 선생님이 학생을 다루듯이 그를 다루셨다”라고 언급한 것을 본다면, 그가 영적 체험을 통해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배워나간 것이 <영신수련> 안에 방법적으로 표현되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냐시오와 같은 시대에 살고 활동한 그의 동지들 역시 <영신수련>이 어떠한 과정과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는지에 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예를 들면 예로니모 나달(Jeronimo Nadal) 신부는 <영신수련>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응답하도록 교육시키는 가장 훌륭한 도구라고 설명하면서, 사부 이냐시오가 만레사에서 기도와 보속의 삶을 시작하셨을 때 하느님의 은총과 이끄심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냐시오의 비서였던 후안 폴랑코(Juan Polanco) 신부는 만레사에서의 신비적 조명 체험 안에 <영신수련>의 씨앗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이냐시오의 동지들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푸셨음을 감지할 수 있었고, <영신수련>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 형성되어진 것이라고 여겼다.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자서전]을 기록한 곤살베스 데 까마라(Goncalves de Camara) 신부는 <영신수련>의 기원에 관한 다음과 같은 증언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지금까지 수록한 이야기를 사부께 듣고 난 뒤 10월 20일 필자는 어떻게 <영신수련>과 [회헌]을 초안했는지 알고 싶다고 순례자[이냐시오]께 문의를 했다. 그는 <영신수련>은 단번에 작성된 것이 아니며, 자신의 영혼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하리라는 생각에서 틈틈이 적어 두었노라고 대답하셨다. 예를 들자면 <양심성찰>을 크기가 다른 선(線)으로 표시한 것과 그밖의 예들도 그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사부께서는 <생활방식의 선택을 위한 길잡이> 등은 로욜라에서 다리를 앓고 있을 때 경험했던 다양한 정신과 사상에 그 유래가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이냐시오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은혜에 의해 자신에게 베풀어진 특수한 영적 체험을 성찰하며 다른 영혼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틈틈이 적어 두었고, 결국 이것이 <영신수련>이라는 조그마한 책자의 골격이 되었다. 즉 <영신수련> 안에는 이냐시오의 하느님 체험이 네 주간으로 구성된 영적 수련의 방법론이라는 특수한 모양으로 담겨져 있다. 우리는 특별히 성서적인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인간이 걷게되는 영적인 여정 사이의 어떤 연관성을 살펴보면서 <영신수련>의 기원으로서의 이냐시오의 영적 체험을 살펴보겠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영신수련>의 역동성이 드러날 것이다.

 

 

<영신수련>과 이냐시오의 체험들

 

일반적으로 <영신수련>의 내적 구조는 세 단계에 걸친 이냐시오의 영성적 여정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본다. 첫째 시기는 로욜라城에서의 체험으로, 개인적 고행의 삶을 통해 영신식별에 관한 기본적 경험들을 얻게 되는 시기를 말한다. 둘째 시기는 만레사에서의 체험으로, 여러 신비적인 체험들이 이냐시오의 영적 세계관을 형성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영신수련> 고유의 <그리스도 왕국>, <두개의 깃발>, <겸손의 세 가지 단계> 등의 묵상과,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엮어진 둘째 주간의 기본 구조가 형성된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시기는 알카라, 살라망카, 그리고 빠리에서의 연학시기로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통해 자신의 체험을 세세히 성찰하면서 <영신수련>의 기본 골격을 구체적으로 형성시킨 시기이다. 이 시기에 특별히 이냐시오는 <원리와 기초>, 첫째 주간의 묵상들, <교회와 더불어 생각하는 방식> 등을 심화된 신학과 성서적 지식을 바탕으로 완성시켰다.

 

이러한 세 단계의 구분을 바탕으로 우리는 <영신수련>의 내적 기원으로서의 이냐시오의 체험을 살펴보면서,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구원의 개관적 지평과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 체험되는 구원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주관적 지평 사이에 어떤 차이점, 어떤 연관성, 그리고 어떤 연속성이 있는가의 문제를 살피게 될 것이다.

 

 

로욜라城에서의 체험

 

<영신수련>의 내적 기원에 대해 연구하면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만레사에서의 내적 체험이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적으로 만레사 시기에 앞서 있다는 의미에서 뿐만이 아니라, 만레사에서의 체험이 가능하도록 밑바침이 되었다는 이유에서 로욜라에서의 회복기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521년 8월 말(혹은 9월 초)부터 다음해 2월 말까지, 로욜라에서의 여섯 달 동안 특별히 [그리스도의 생애](Vita Jesu Christi)와 [성인들의 꽃](Flos Sanctorum)이라는 두 권의 책이 이냐시오의 삶에 중요하게 부각된다.

 

그는 평소 세속적인 소설책 기사(騎士)들의 무용담이 담긴 책들을 매우 즐겼다. 건강이 좋아지자 그는 소일도 할 겸, 그런 책들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가 평소에 즐겨 읽던 소설책들이 집에는 마침 한권도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스페인말로 된 <그리스도전>과 <성인열전(聖人列傳)>을 가져다 주었다. 이 두 권의 책을 여러번 거듭 읽는 동안 그는 그 내용에 진지한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때로는 책을 옆으로 밀어놓고 금방 읽은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하고, 때로는 전부터 생각해 오던 세상사를 공상해 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진지한 흥미와 열정으로 이 책들을 읽고 묵상하면서, 이냐시오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요점들을 베껴 썼다.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얻게 되는 영적 깨달음들은 이냐시오에게 회심의 객관적인 시발점을 제공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는 세상에 대한 봉사와 하느님께 대한 봉사의 두 갈래의 갈림길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두 권의 책 내용을 검토하는 것은 이냐시오의 내적 체험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이미 많은 연구들이 <영신수련>과 이 두 문헌 사이에 어떤 문맥상의 연관이 있는지를 밝혔다.

 

로욜라에서 일어난 이냐시오의 회심은 두 단계에 걸쳐 이루어진 선택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보다 더 원천적인 차원에서의 선택으로서, 세상에 대한 봉사보다는 하느님께 대한 봉사에 자신의 삶을 내어주고자 하는 선택이었다. 둘째 단계는 여기에서 파생되는 것으로서, 카르투시오적인 은수자의 삶과 [성인들의 꽃]에서 발견되는 보속 순례자의 삶 사이에서 보속 순례자의 삶을 택하는 선택이었다. [성인들의 꽃]에서 읽은 성인들의 삶이 이냐시오의 둘째 단계의 선택에서 중요한 매개로 작용했음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첫째 단계의 회심에 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그 어떠한 아무런 외적인 매개 없이 자유롭게 이냐시오의 내적 체험을 이끄셨다고 볼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냐시오는 이 책들을 읽기 전에 미리 자신의 삶을 개선해야겠다고 마음을 작정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책들을 읽고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을 개선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어서 성인들의 삶을 본받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들의 꽃]보다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이냐시오의 일차적 회심에 더 중요한 원천적 역할을 담당했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애]

 

<영신수련>의 다양한 원천들에 대한 연구가 이미 밝혔듯이, <영신수련>은 그 표현에서 뿐 아니라, 복음서의 이야기를 설정하는 데에서도 [그리스도의 생애]와 유사한 부분이 많이 있다. 이러한 유사점들이 설사 근본적으로 <영신수련>에 대한 연구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지라도, 이냐시오 자신이 얼마나 친밀하게 이 작품을 읽고 묵상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그러므로, 그가 수 개월간 읽고 묵상한 [그리스도의 생애]의 구성과 신학적 관점 등을 살펴 본다면, 이 책에 의하여 이냐시오에게 성서적 구원의 관점이 어떻게 객관적 지평으로 제시되었던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냐시오의 영성의 골격이 되는 성삼위께 대한 신심,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심, 그리고 구원의 역사 안에서의 인간의 실존 등은 로욜라에서의 영적독서와 묵상을 배경으로 형성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애] 서장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통합적 기본 개념을 성서와 교부들의 가르침을 인용해서 간결하게 제시하고, 이들을 실천에 옮기도록 격려하는 훈화를 덧붙인다. 이냐시오는 이 서장을 오랫동안 묵상했을 것이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영신수련>은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비슷하다. [그리스도의 생애] 서장에서 그리스도는 ‘구원의 기초’(salutis fundamentum Christus)로 제시되고,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묘사된다. 이러한 비참한 인간 실존에 결정적인 해답으로 제시된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이어서 저자 루돌프는 그리스도께 대한 인간의 두 차원의 응답이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죄인인 인간은 마땅히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용서받아야 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즉 구원의 길은 정화의 단계를 거쳐,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분의 삶을 따르기로 투신하는 봉사의 단계로 넘어가는, 두 차원의 응답의 통일된 과정이다. 물론 정화의 단계가 죄를 깊이 뉘우치고 선행을 하도록 권고하는 등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묘사되지만, 회심의 깊은 내적 과정이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시는 자비로우신 그리스도께 온전히 의존된 과정임이 여기에서 강조된다. 루돌프는 그리스도께 온전히 투신하는 둘째 단계를 더 인격적이고 지성적인 응답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심화되고 조명된 신앙의 관점에서 복음서의 묵상을 전개한다. 그는 전통적으로 전해오는 성 요한 금구와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등의 성독서(lectio divina)의 가르침을 이용해서, 복음서의 묵상 내용이 하루의 삶과 행동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도록 격려한다.

 

루돌프는 전통적으로 전해오는 7가지의 묵상 동기, 묵상을 통해 얻어지는 영적 열매들을 설명하고, 이냐시오가 <영신수련>에서 한 것처럼, 예수의 생애를 차례로 관상하도록 그 목록을 제시한다. 그가 묵상의 방법을 설명하면서 강조한 점은 독자로 하여금 복음서의 장면 속으로 자신을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고, 그런 방법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이러한 묵상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한 복판에서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의 현존에 임하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루돌프는 묵상 중에 멈추어 깊이 숙고함으로써 영적 신익을 거두라고 조언한다. 그는 성인들, 특별히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의 예를 들면서, 성서를 통한 묵상에서 영적 신익을 풍부히 얻는 것이 영성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한다. 이렇게 루돌프는 [그리스도의 생애]의 서장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구원의 기초로 제시하면서 성서 묵상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서장 이후의 따라오는 181개의 장들은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를 이러한 관점에 따라 묵상해 가도록 구성되어있다. 이냐시오는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서장을 오랜 기간 읽고, 자신의 영적 독서와 묵상에 이것을 적용하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루돌프의 [그리스도의 생애] 제 1장은 요한복음 서장을 바탕으로 하는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에 대한 묵상이다. 이 묵상의 관점과 배경은 이냐시오의 영성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즉 요한 복음사가의 의도와 같이, 이 책에서도 그리스도는 엄위하신 하느님으로 묘사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냐시오에게 그리스도는 늘 엄위하신 주님이셨다. 그분은 모든 우주 만물, 즉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만물의 중심이시며 구원의 기초이시다. 그분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만물을 주재하시는 성부와의 관계를 특별히 육화의 신비를 통해 드러내신다. 이 묵상을 통해서 제시된 그리스도께 대한 인식은 특별히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표상에 담겨진 두 차원의 관계를 통해서 이냐시오의 영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말씀은 하느님의 계시일 뿐아니라 인간의 창조자이시다. 그리스도께 대한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냐시오는 루돌프의 [그리스도의 생애] 서장과 요한복음의 서장을 오래 묵상했을 것이고, 이러한 그리스도관은 이냐시오의 영적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계속해서 루돌프는 성자와 성부의 관계를 삼위일체의 신비로운 관계 안에서 묘사한다. 성삼위의 신비를 떠나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이냐시오는 그리스도의 품격을 통해서 성삼위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었으며, 오직 성자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계시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 이르게 하는 길이시며, 그리스도 자신도 결코 성삼위의 신비로운 관계를 떠나서 자신을 이해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기 위해 우리 인간에게 다가 오셨다.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해 성삼위의 마음은 말씀으로 사람이 되심으로써 죄스러운 인간을 당신과 화해하도록 이끌어 주셨다. 루돌프는 이 묵상을 성삼위의 각 위께 드리는 담화기도로서 마무리 한다. 인간이 마땅히 흠숭을 드리고, 찬양하고, 영광을 드려야하는 창조주 엄위하신 하느님과의 관계가 이러한 묵상을 통해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냐시오는 영적 독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깊이 이끌리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삶과 말씀, 그분이 활동하셨고 일하신 장소 등에 대한 신심을 통해서 영원하신 주님께 대한 끝없는 공경심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이냐시오의 영성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하는 성삼위의 신비에 기반한다는 것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제 2장에서는 역사적이며 동시에 신학적인 죄의 현상을 다루면서 인간의 죄스러운 실존에 대해 묵상한다. 천사와 원조들의 죄는 창조주 하느님을 거슬러 자신을 들어 높힌 죄이며,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반기를 든 죄인 것이다. 이냐시오는 자신의 내부 세계를 넘어, 즉 자신의 개별적인 역사를 넘어, 우주적인 차원에서 대립되어 있는 하느님과 세속의 갈등에 눈을 뜨게 된다. 죄란 창조주 하느님을 거스르는 힘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힘에 의해서만 이 힘이 극복될 수 있음을 깨달은 이냐시오의 내면에서는 깊은 내적 평화가 자리하게 된다.

 

루돌프는 계속해서 마리아의 탄생부터 성신강림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해 간다. 이냐시오는 이 묵상들로부터 많은 요점들을 <영신수련>을 구성하는데 도입했다. 이와 같이 구원의 역사를 서서히 밝혀내는 면에서 뿐 아니라, <영신수련>의 전체 구성에서도 많은 요소들이 [그리스도의 생애]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앞에서의 고찰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영혼을 풍족케 하고 또 만족시키는 것은 풍부한 지식이 아니라, 사물의 내적 내용을 깊이 깨닫고 맛보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듯이, 분명히 이냐시오는 이 루돌프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깊은 영적 기쁨을 맛보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론적이며 동시에 삼위일체적인 루돌프의 영성 사상이 이냐시오의 영성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성인들의 꽃]

 

이 작품이 이냐시오의 영성에 끼친 영향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비교할 때 그리 큰 것은 아니지만, 이냐시오의 [자서전]에서는 더 자주 언급된다. [성인들의 꽃]이 이냐시오에게 끼친 영향은 [그리스도의 생애]가 끼친 영향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그리스도의 생애]가 이냐시오의 영적 이해에 영향을 끼치면서, 그로 하여금 하느님 구원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의 위치를 알게 하고, 묵상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찾아내고, 자신의 삶의 가치를 식별하도록 이끌어 주었다면, [성인들의 꽃]은 성인들의 영웅적 모범으로써 이냐시오의 의지를 자극해서 그가 실현할 수 있는 이상을 향해 투신하도록 격려했다.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되어 항상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겸손함을 모방하는 것 외에, 또 다른 구체적인 동기가 이냐시오의 마음을 이끌었다. 그것은 바로 성인들, 즉 ‘십자가의 기사들’의 모범들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성 오누프리우스, 성 프란치스꼬, 성 도미니꼬 등은 이냐시오에게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냐시오는 복음서와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자신의 지난날을 보다 정직하게 반성하게 되고 속죄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했고, 성인들의 삶을 기록해 놓은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그것들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물론 순진한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이냐시오가 로욜라성에서 이 두 권의 책으로 무료한 시간을 채워야 했던 상황은 하느님의 섭리로서 이해될 수 있지만, 우리는 이 두 권의 책 사이에서 보여지는 조화를 잠시 살펴보야야 할 것이다.

 

루돌프의 [그리스도의 생애]에 펼쳐진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신학적 관점은 야고버 데 보라지네(Jacobus de Voragine)의 [성인들의 꽃]이 펼치는 영적 분위기와 매우 유사하다. 몬테지노는 루돌프의 [그리스도의 생애]를 스페인어로 번역하면서, 그 책의 서문에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 여왕께 헌장하는 글을 썼다. 그는 그 글에서, “세상의 군주는 하느님의 왕국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라고 초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양위 폐하께서는 현세 군주들의 통치권이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쇠퇴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 요한 금구의 말을 빌린다면,) 지상의 왕권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왕국의 상징이자 표지에 불과합니다. 선량한 군주들은 지상에서 왕권을 다 행사한 뒤에 천국에서 이 영원한 왕국을 함께 누릴 것입니다. … 그렇지만 지상의 군주들이 이 하느님의 왕권에 속하는 사정에 관해서 보다 열심하고, 하느님의 신묘하신 섭리가 보내시는 재앙과 환난을 선용하여 자기들의 영원하시고 지존하신 임금께 봉사와 존경을 표하는 기인을 삼는다 하면, 지상 통치권이 장차 올 불멸하는 왕권의 표이자 상이 되는 것입니다.

 

한편 가벨토 바가드는 야고버의 [황금전설](Legenda aurea)을 스페인어로 번역한 책, [성인들의 꽃]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모든 덕의 으뜸이시며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십자가를 손에 들고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기사들인 성인들의 충성에 깃들고 힘차고 영광스러운 깃발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왕중의 왕, 주님들의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서 비추어져 나오는 저 고귀한 능력, 저 비길 데 없고 불가해하며 어느 군주보다 뛰어난 도량을 우러러 뵙는다. 말하자면 그분은 우리가 복자들의 성스럽고 영광스러운 삶에로 들어가기 위한 문이십니다. 누구든지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오른손에 십자가를 쥐고 그것을 높이 쳐들어야 할 것입니다. 국왕의 승리와 경사를 고하는 깃발처럼 말입니다. 관대한 영혼들을 영원한 개선으로 인도하는 푯대처럼 말입니다. 성인들이 기사다운 마음으로 가슴에 두르고 세속과 육신과 마귀를 정벌하러 나아가는 문장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마귀는 지옥의 모든 종자들과 더불어 단죄받은 무리들을 거느리고서 혼겁하여 멀리 멀리 쫓겨갈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 권의 책은 그리스도의 삶을 최고의 이상으로 제시할 뿐 아니라, 성인들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분을 따르며 섬길 수 있는지를 이냐시오에게 제시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가 로욜라성을 떠날 때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어떤 것이 더 올바른 응답인지 시행착오를 통해서 이냐시오 스스로 배우는 길은 더 멀고 길었다. 특별히 이냐시오는 로욜라에서의 자신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세상사를 공상할 때에는 당장에는 매우 재미가 있었지만, 얼마 지난 뒤에 곧 싫증을 느껴 생각을 떨치고 나면 무엇인가 만족하지 못하고 황폐해진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 맨발로 걷고 초근목피로 연명해가는 성인전에서 본 고행을 모조리 겪는다고 상상을 해보면, 위안을 느낄 뿐만아니라, 생각을 끝낸 다음에도 흡족하고 행복한 여운을 맛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이것을 이상히 생각지도 않았고 그 차이를 따져볼 엄두도 안냈었다. 그러다가 차츰 그의 눈이 열리면서 그는 그 차이점에 놀랐고 곰곰이 따져보기 시작했으며 드디어는 앞의 공상은 씁쓸한 기분을 남기는데 다른 공상은 행복감을 준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달아 갔다. 그는 서서히 자기를 동요시키고 있는 두 정신의 차이를 깨닫기에 이르렀으니, 하나는 <악마>에게서 오는 정신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이었다.

 

이 독서로부터 적지않은 식견을 쌓아가면서 그는 자신의 지난날을 보다 정직하게 반성하게 되고 속죄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급기야는 성인들을 본받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구체적인 상황같은 것은 거의 생각지 않았으나, 성인들이 한 것처럼 하느님의 은총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서원을 했다. 그의 소망은 완쾌가 되는 대로, 하느님에 의해 고무되어 관대한 영혼들이 으례 소망하는 바와 같이 온갖 고행과 극기를 수행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이었다.

 

로욜라 시기는 하느님을 향한 근본적인 회심이 이루어진 시기였으며, 아직 구체적인 방법 같은 것은 거의 생각하지 못하면서 단순히 성인들을 본받겠다는 생각을 지니게 된 시기였다. 여기에서 성인들의 삶을 본받겠다는 열망보다 앞서는 것은 지존하신 하느님께 빚을 졌다는 인식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영혼 속에서 결국 보속에 대한 열망과 성인들의 행적을 본받겠다는 열망을 불러 일으켰다.

 

 

만레사에서의 체험

 

로욜라에서의 깊은 회심은 만레사에서의 오랜 정화의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를 향한 과감한 투신으로 전개되어 간다. 이냐시오가 겪은 정화의 과정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기는 대단히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시기가 신앙의 신비에 관해서 많은 체험적이며 영적인 깨달음을 얻은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냐시오는 이미 읽고 묵상하며 요점을 기록해 둔 성인들의 삶을 상기하면서, 그리고 [준주성범]을 통해서 많은 영적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또 한편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읽으면서 많은 영적위로를 받았으며, 영적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냐시오는 1522년 3월 24일, 혹은 25일경의 성모축일에 몽세라트에서 철야기도를 올리며 성모님께 자신의 검을 봉헌한 후, “바르셀로나에 가는 길로 들지 않고 만레사라는 마을로 떠나, 거기에서 며칠 묵으면서 지금까지 소중히 지녀왔고 크게 위안을 받아 왔던 그 책에다 몇 가지를 써넣기로 했다.” 이 며칠이 결국 10개월로 늘었으며, 하느님께 사로 잡혀 그의 영적 열망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향한 투신이 차츰차츰 정화되어 갔다. [자서전]은 이 만레사에서의 체험을 아주 소상히 전해준다. 이냐시오는 성인들의 삶, 특별히 성 오누프리우스의 삶을 모범삼아 기도와 보속의 새로운 삶으로 투신하면서 많은 위안을 느꼈으며, 자신의 외관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기도하고 단식하면서 구걸로 연명해 갔다. 하루에 세번 자신의 죄를 돌이키며 마음 아파했으며, 깊은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맛보기도 했다.

 

이 시기에 특별히 두 가지 유혹이 그의 평화와 위안을 앗아갔다. 이 중 첫번째의 것은 깊은 내적 조명을 받은 후에야 유혹으로 알게 된 것이었다.

 

밝은 대낮에 자기 주변의 허공에서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일이 때때로 일어났다. 그것이 너무나 아름다와서 그는 큰 위안을 맛볼 수 있었다. 무슨 물체인지는 정확히 식별할 수 없었지만, 때로는 눈동자같이 반짝이는 물건들이 많이 달린 뱀의 형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 물체를 보는 데 재미와 위안을 느꼈고, 자주 볼수록 점점 더 커다란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면 그는 슬퍼지는 것이었다.

 

한참만에 그 비추임이 끝나자 그는 십자가 곁에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러자 여태까지 여러번 나타났지만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환시, 즉 수많은 눈동자를 가진 그토록 아름다운 형상이 또 나타났다. 그렇지만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 형상을 뚜렷이 바라보느라니 그 물체가 여느 때 보이던 아름다운 색깔을 하고 있지 않았으며, 거기서 그는 그것이 악마로부터 오는 것임을 똑똑히 알았고 자기 의지를 굳게 확인하였다. 그 뒤로도 그 형상은 여러번 나타났지만 그때마다 경멸의 표시로 손에 든 지팡이를 휘저어 쫓아버리곤 했다.

 

이 유혹은 세상의 헛된 명예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진 체험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신이 특별한 인물로 간주되고 외부의 관심을 통해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자유로와져서, 오히려 내적인 자기 포기를 통해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느끼게 된 경험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유혹은 마음 속에서 의심의 소리로 다가왔다:

 

그는 돌연 자기의 생활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를 깨우쳐 주는 듯한 고약한 생각이 떠올라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마음 속에서 “앞으로 남은 칠십 평생을 어떻게 이 고된 생활을 해나가겠느냐?” 하고 누군가가 질문을 던져오는 듯했다.

 

하느님께 깊이 의존하지 못할 때, 그 누구도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보속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충분한 이유를 지닐 수 없을 것이다. 이때 현실과 이상의 거리감 속에서 일어나는 세심증과 걱정이 죄책감과 절망감을 영혼 안에 불러 일으키고 괴로움을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똑같은 체험이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 앞에서 너무나도 무력한 자신의 처지를 깊이 경험하며 희망의 유일한 원천이신 하느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게 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 당시에 이냐시오는 이러한 것들을 쉽게 식별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내적 고통을 통하여 영들의 다양성에 대해 서서히 배워갔다. 이냐시오는 “하느님께서는 학교 선생님이 학생을 다루듯이 그를 다루셨다”고 고백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체험을 묘사한다.

 

몽세르라트에서 그는 단단히 준비하고 성찰한 바를 빠짐없이 기록까지하여 총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을 빌면, 어쩐지 몇 가지를 고백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큰 근심이 되었으며, 빠뜨렸다고 생각되는 일을 고백하고 나서도 아무래도 안심이 안되었다. 이 소심증을 치료해 줄 만한 훌륭한 사람을 찾아다녔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대성당에서 설교를 맡은 학식 많고 영성깊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고백성사를 주면서 기억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써놓으라고 시켰다. 그 말대로 했으나 고백성사를 받고나자 소심증은 곧 되돌아왔으며, 그때마다 더 미미한 일들이 생각나서 번민은 갈수록 심해졌다. 이 세심이 그를 해롭게 하니, 그것을 떨쳐버리는 편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깨닫기는 했지만 자기 마음을 스스로 가눈다는 것이 또한 어려웠다. 때로는 과거의 일은 더 이상 고백하지 말라고 고백사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기한테 엄명을 내린다면 아마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고백사제가 그렇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고백사제에게 차마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본인이 입밖에 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제는 정말 확실한 것이 아니라면 과거의 일은 더이상 고백하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하지만 이 명령은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그래서 곤란은 그치질 않았다. 그 무렵 그는 도미니꼬회 수도원에서 내준 자그마한 골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일곱시간을 계속해서 기도를 올리고 한밤중에도 잠자지 않고 기도를 계속하며 앞서 말한 신심업도 빠짐없이 바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고행도 그의 세심을 치료해 주지는 못하였다. 세심증에 시달림받는 나날이 여러 달이나 계속되었다. 한번은 세심에 시달리다 못해 간곡한 기도를 드리면서 마침내 큰 소리로 하느님께 외쳤다. “주님, 붙들어 주십시오. 사람들 가운데서나 피조물에게서는 아무 처방도 얻지 못했읍니다. 그렇지만 그런 처방을 찾아낼 수 있다면 어떠한 수고든지 달게 받겠읍니다. 오 주님, 치유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십시오. 강아지 뒷꽁무니를 따라다녀야 한다고 하더라도, 도움만 된다면 얼마든지 따라다니겠읍니다.”

 

이런 상념에 시달리는 동안 그는 방안에 있는 커다란 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지고 싶은 격렬한 유혹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가 기도하는 자리 바로 곁에 큰 구덩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살은 죄임을 깨닫고 “주님, 주님께 득죄하는 짓은 결코 아니하겠나이다” 하고 곧 사뢰었다. 그리고 이 두 기도문을 여러번 되뇌었다. 그때 간절한 소망을 하느님께 받기 위해 소원이 성취될 때까지 여러 날을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고 견디었던 성인의 이야기가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한참 그 일을 생각하다가 자기도 그렇게 하기로 드디어 작정했다. 하느님께서 자기 세심을 치유해 주실 때까지, 아니면 죽음이 진실로 임박했다고 느껴질 때까지 식음을 전폐할 것을 다짐하였다. 먹지 않아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느껴질 때는 빵을 달라고 청해서 먹기로 했다 (물론 빵을 달라고 청할 수 있는 힘이 있고, 먹을 기운이 아직 남아 있을 때 하는 말이다).

 

그는 주일에 성체를 영하고 나서 고행을 시작하였다. 한 주간 내내 아무것도 안 먹었으나 평소의 신심업은 그대로 하며 성무일도에 참여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면서 여러번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주일에 그는 고백성사를 받으러 가서 고백사제에게 자기가 한 일을 자세히 아뢰곤 했으므로 그 주간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지낸 일을 말씀드렸다. 그의 고백사제는 단식을 당장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자신은 아직도 체력이 왕성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제의 말에 복종하였고, 그래서인지 그날과 이튿날은 세심에서 자유로와진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사흘째되는 화요일에 기도를 바치고 있느라니 자기의 죄가 하나하나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하여 그는 과거에 지은 죄들을 하나씩 따지게 되었고 드디어는 죄를 다시 고백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에 연이어서 지금 자기의 삶에 강한 혐오감이 느껴지고 이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까지 했다. 주께서는 이런 방식을 거쳐 그가 꿈결에서 깨어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느님이 내리시는 가르침을 통해 그는 드디어 <영(靈)들의 다양성>에 관해서 몇가지 경험을 얻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영들이 엄습해오는 방법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침내 그는 과거지사는 더 이상 고백치 않기로 굳은 결심을 세웠다. 그날로부터 그는 세심을 벗어났으며, 주께서 자비로이 자기를 해방시키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냐시오의 이러한 체험은 가장 원천적인 정화의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신수련>의 첫째 주간을 끝마치는 체험이기도 하고, 크신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 자신의 죄스럼을 인정하는 체험을 대변해 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냐시오는 만레사에서의 체험을 통해 얻게 된 내적 은혜들을 성삼위의 신비, 창조의 신비, 성찬의 신비, 그리스도의 인성, 성모 마리아께 대한 새로운 인식등의 다섯 가지로 요약해서 [자서전]에 전해 준다.

 

첫째, 그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께 극진한 신심을 가졌고, 매일 성삼위 각위께 기도를 바쳤다. 그런데 성삼위께 기도를 드릴 때면 무엇때문에 성삼위께 네차례의 기도를 올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곤하였다. 하지만 이 생각은 대수롭지 않은 일로서 그다지 곤란을 끼치지는 않았다. 하루는 수도원 층계에 앉아 <성모의 성무일도>를 염하고 있노라니 그의 오성이 승화되더니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가 세 개의 현(弦)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끝내는 흐느끼며 자제를 잃고 말았다. 그날 아침에 그 층계 위에서 시작된 이 감격은 점심 때가 되도록 눈물을 거두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점심을 먹은 후, 그는 크나큰 희열과 위안을 느끼며 여러 다른 비유를 들어가면서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께 기도하던 때에 경건심을 체험했던 그 인상은 평생을 두고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둘째,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던 손길로 언젠가 자신을 비추어 주셨는데, 그는 거기에서 위대한 영성의 환희를 맛보았었다. 그가 느끼기로는 하얀 물체를 본 듯도하고 그 물체에서 몇 줄기 광선이 흘러나오는 듯도 했는데, 하느님께서 그 물체로부터 빛을 내보내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일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랐고, 그 순간에 하느님께서 자기 영혼에 비추어 주셨던 조명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세째, 그가 근 일년간 보낸 만레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위안을 주시기 시작하고 하느님께서 영혼들을 치유하시는 효험을 본 후, 그는 형식을 따라 고수해 오던 극단적인 행위를 중단하고 손톱과 머리를 깎았다. 그러던 어느날, 앞서 말한 수도원 성당에서 미사를 참례하고 있는데 거양성체 때 새하얀 광선같은 것이 위에서 내려옴을 심안으로 보았다. 먼 훗날에 와서도 그는 이 일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극히 거룩한 그 성사에 어떻게 현존하시는가 하는 사실을 그는 심안으로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넷째, 그는 기도중에 자주, 그것도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그리스도의 인성을 심안으로 뵈었다. 그에게 나타난 형상은 그다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흰 몸체인데 지체는 뚜렷이 보이지는 않았다. 만레사에서 그는 이것을 여러번 보았었다. 스무 번 내지 마흔번을 보았다 해도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에서도 이것을 보았고, 다음에 빠두아 근처를 여행하다가도 보았다. 또한 성모님도 비슷한 형상으로 뵈었는데 지체를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었다. 그가 본 것들은 그를 강화시켰고, 그 후에도 언제나 그의 신앙을 굳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신앙에 관한 이런 신비들을 가르쳐주는 성경이 없다 하더라도 자기는 자기가 본 사실만으로도 신앙의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다섯째, 한번은 그가 신심으로 만레사에서 일 마일쯤 떨어진 성당으로 길을 나섰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성 바울로 성당이라고 했던 것 같다. 길은 까르도넬 강가를 뻗어 있었다. 길을 가다가 신심이 솟구쳐 그는 강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앉았다. 강은 저 아래로 흐르고 있었고, 거기 앉아 있을 동안 그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비록 환시를 보지는 않았으나 영신 사정과 신앙 및 학식에 관한 여러 가지를 깨닫고 배우게 되었다. 만사가 그에게는 새로와 보일만큼 강렬한 조명이 비쳐왔던 것이다. 비록 깨달은 바는 많았지만 오성에 더없이 선명한 무엇을 체험했다는 것 외에는 자세한 설명을 못했다. 그는 예순 두해의 전생애를 두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그 많은 은혜와 그가 알고 있는 많은 사실들을 모은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 그가 받은 것만큼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체험들은 까르도네르 강가에서의 체험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이 체험은 이냐시오가 이제껏 받은 모든 영적 인식과 체험들이 한데 엮어져 한 결정체를 이루는 지성적 인식의 통합적인 체험이었다. 우리가 여기에서 특별히 관심을 갖는 바는 이러한 영적 인식이 이냐시오가 로욜라성에서 읽은 책들에 제시되어 있던 영적 세계관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이냐시오 자신도 언급했지만, 그가 지닌 성삼위께 대한 신심은 그가 만레사 시기에 육안으로 뵌 환시에만 의존되어 있지는 않다. 이 신심은 미리 로욜라에서 읽은 루돌프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지니게 된 신심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만레사에서 그의 지성이 신비적으로 조명된 체험은 성삼위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인 그의 신심을 더 없이 깊게하고 심화시켰고, 성인들의 삶을 본받겠다는 막연하고 순진한 열망을 더욱 세련된 투신으로 바꾸어 주었다. 물론 그가 [성인들의 꽃]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겠다는 결심은 하였으나, 아무런 실수나 몰이해 없이 이러한 삶을 추구해 나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냐시오는 실천적으로 경험하는 실패와 좌절의 아픔들을 통해 자신의 결심이 점차로 자리잡혀 가는 체험을 했다.

 

만레사의 체험에서 한 가지 더 언급되어야 하는 점은 지성적 깨달음 내지는 지성적 인식이 강조된다는 특징이다. 즉 신앙의 빛에 의해 조명된 영적 인식이 점차로 증가하면서, 상대적으로 영상이나 상상들은 점차 줄어 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인식은 객관적인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냐시오의 내면의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냐시오의 영적 체험 속에서는 구원의 기초와 계시의 중심으로서의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관심을 사로잡는다. 이냐시오는 엄위하신 하느님을 향한 지극한 존경심과, 가장 거룩한 성삼위께의 최대의 사랑을 지녔다. 이러한 하느님의 지존하신 현존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고 인식함으로써, 이냐시오는 마침내 구원의 기초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자신의 전 삶을 내어드리는 투신을 했다. 즉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창조된 이 세계에서 이루어지도록 초대되었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한 깊은 인식의 체험은 특별히 까르도네르 강가에서의 체험 속에서 깊이 용해되어 나타났고, 따라서 이 체험은 만레사에서의 체험의 집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 영적 인식이 통합되는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중심이시며 계시의 중개자로 체험된다. 계시의 절정은 창조주이신 영원하신 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에 드러났다. 영적 환시들이나 조명들이 개별적으로 이냐시오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라면,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깊은 인식은 오히려 이냐시오의 영적 삶을 하나로 통합해 주는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창조된 만물과 그 주인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느님과의 관계가 화해를 이루며, 바로 이를 통해서 온 우주 만물이 성화되고 구원을 얻게 된다. 이냐시오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이러한 신비를 깊이 인식하고 체험하게 되었으며, 그의 생애는 바로 이 신비를 중심으로 엮어졌다.

 

만레사의 체험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하느님께서 이냐시오에게 가르쳐 주신 것들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객관적인 구원진리에 대한 인식이 없이 이냐시오의 주관적 체험을 깊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만레사에서 아냐시오는 진정한 영적 가난에 도달해서 자신의 이기적 애착으로부터 벗어났다. 가장 극심한 절망에 빠졌을 때, 비로서 하느님의 은총에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지혜를 배웠으며, 이를 통해서 하느님께 온전히 항복할 수 있는 용기와 겸손을 배웠다. 이러한 정화의 단계에 뒤이어 따라온 체험은 이냐시오에게 참된 신앙을 지니도록, 해방시키시고 거룩하게 이끄시는 진리이신 하느님께 자신을 개방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하느님의 신비를 수용하고 받아들임을 통해 그가 이미 로욜라에서 지녔던 순진한 열망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구체적으로 형성되면서, 이냐시오의 삶의 방향은 결정되어 나갔다. 복음적 가난과 진정한 마음의 겸손, 그것이야 말로 참다운 신앙이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었다. 만레사에서의 체험은 끊임없이 이냐시오를 변화시켜갔으며,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갔다. 물론 자신의 비참함을 깊이 인식하게 될 때 은총의 힘에 자신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반드시 하느님의 은혜로운 현존 앞에서 만이 진정 그리스도인다운 태도가 우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영신수련>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바와 같이, 무한히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로부터 얻어지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발점이 된다. 이러한 시발점을 바탕으로, 이냐시오의 삶의 근본 방향은 은총과 구원의 중개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구원의 역사에서 하시는 역할에로 설정된다. 이러한 것은 특별히 <영신수련>의 <그리스도 왕국> 묵상과 <두개의 깃발> 묵상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영성적 교육도구로서 표현되었다. 이냐시오는 구원의 역사에 몰입함으로써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놓아 주시는 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냐시오의 마음 깊숙이에서 불타오르는 열망은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만레사에서의 이냐시오는 아직 이 열망을 구체화하지 못한 상태였으나, 점차로 구원의 역사와 교회의 신비에 눈을 뜨면서 진정 가난하고 겸손한 영적 마음 속에서 은총의 힘으로 서서히 배워 나갔다. 그는 하느님의 도움이 없이는 남을 구하는 일에서 뿐 아니라, 자신의 구원에 관해서도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서서히 배워 나갔다. 서서히 이루어진 이러한 배움은 <영신수련> 안에 사랑을 그 최고의 원리로 삼는 영신식별에 대한 규칙으로 표현되어 있다.

 

거의 일년간을 만레사에서 생활하는 동안 여러 영적인 싸움과 갈등, 수많은 은총을 통해서 이냐시오의 마음 안에는 <영신수련>의 씨앗들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그곳을 떠날 때 쯤에는 이미 <영신수련>의 기본 사상과 골격이 이냐시오의 영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영신수련>을 해석하는 한 가지 관점

 

성부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계시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바로 그분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서, 모든 인간을 한 형제 자매로서 받아들이며, 우주적 구원사업에 동참함으로써 신적 생명에 참여하도록 초대된 소명을 의식해야 한다.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은혜에 이끌려 그분의 계시된 구원계획에 동참함을 통해서 영적으로 자신을 재 점검할 때, 더 진보하고 더 조명된 마음과 관대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명에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체험한다 함은 그리스도의 구원적 교의와 은총이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여기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깊이 인식하고 수용하는 체험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서 창조되고 이끌리는 우주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부께로 나아간다. 인간은 보잘것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우주적 구원의 여정에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며 동참하도록 초대되었다. <영신수련>의 그리스도의 왕국 묵상에서 이냐시오는 다음과 같이 이 소명을 표현한다:

 

영원한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계 사람들을 당신앞에 두시고,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부르시면서 ‘나의 소원은 전세계와 모든 원수를 다 정복하고, 내 성부의 영광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나와 같이 수고해야 할 것이다. 즉 이 다음에 영광 중에 나를 따르기 위하여 어려운 때에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얼마나 더 생각할 가치가 있는지 묵상해 볼 것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냐시오의 내적 체험에 대한 이해는 <영신수련>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로욜라성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들의 꽃]을 읽으면서 이냐시오에게 객관적인 지평으로 제시된 영적 지식들이 어떻게 이냐시오의 내부에서 주관적인 응답으로 표출되었는지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만레사에서의 체험을 통해 이냐시오는 객관적으로 제시되고 설정된 구원의 진리를 묵상하고 자신의 지난 삶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다 보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점점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어 갔고, 점차로 얻게된 영적인 새로운 인식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이 구원의 역사에서 주 그리스도께서 펼치시는 구원 사업에 대한 결정적인 투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냐시오의 깊은 영적 체험들이 구체적으로 <영신수련>으로 표현되면서 발전한 것이었다. 즉 <영신수련>에서는 하느님의 구원적 현존 앞에서 일어나는 철저한 정화와,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기적 사욕을 극복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자신을 내어 놓도록 영혼을 이끌어 나가는 과정이 하나의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신수련>의 기원은 만레사에서의 체험에 있다. 하지만 로욜라에서의 체험과 만레사에서의 체험 사이에는 이냐시오가 영적 독서를 통해 얻게된 구원의 객관적 진리라는 연결점이 놓여있다. <영신수련>의 기원은 하느님을 만나면서 얻어지는 영적 생동감, 바로 그것이다. 이 영적 생동감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중심 계시진리를 향해서 자신을 온전히 개방하도록 촉구한다. 그리고, 이 개방된 자세를 바탕으로 다른 모든 은총과 체험은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과 영적성장을 위해서 <영신수련>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향해 회심하도록 촉구한다면, <영신수련>을 해석하는 일 그 자체가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흠숭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관상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심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것이며, 서서히 지금 여기에서 밝혀지는 구원의 역사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작업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러한 것이 <영신수련>이 기대하는 열매이기도 하다.

 

객관적인 지평에서 <영신수련>에 펼쳐지고 표현된 구원의 진리에 대한 이해 없이 <영신수련>을 올바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신수련>은 우선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냐시오의 영적 체험과 그의 <영신수련>을 구분해서 다룰 필요는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둘은 객관적인 지평과 주관적인 응답이라는 차원에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구원진리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없이 단지 심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영신수련>을 다룰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영신수련>의 형성 그 자체가 이냐시오의 체험안에서 전개된 역동적 과정을 반영하고 있기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어떻게 <영신수련>을 통해 선포되고 전해지는가는 이미 <영신수련>의 기본 구조 안에 담겨져 있다. 즉, <영신수련>은 이것이 불러 일으키는 영적 체험이 <영신수련>을 해석하는 눈을 지니도록 이끌어 주고, 그 자체 안에 해석의 틀이 제공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끝)

 

[신학전망 105호 pp147-168/ 심종혁 신부님 홈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