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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전 례 음 악

[전례 상식] 전례와 성음악

by 파스칼바이런 2011. 10. 21.

[전례 상식] 전례와 성음악

 

이종철 베난시오(하남시 서부본당 신부)

 

 

“알렐루야 노래하자 기쁜 때가 왔도다. 온 세상에 기쁜 소식 용약하여 전하자.”

 

부활! 우리 그리스도인이 희망을 걸고 이승의 괴로운 나그네 삶을 사는 거소 바로 이 부활 때문이다. 부활의 노래와 전례는 신자들의 마음을 생명과 희망으로 드높인다.

전례 성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분의 영광을 찬미하는 인간의 선물, 옛부터 노래는 인간의 깊은 마음의 정을 실어 나르는 매체의 역할을 했다.

미사성제를 돕는 성가 역시 주님의 수난에 대한 우리의 감사와 깊은 사랑을 전달하는 사랑의 촉매이다.

 

매주일, 아니 매일 우리는 미사 성제 안에서 주님을 찬미한다.

사순절에는 그분의 수난을 함께 아파하고, 그 모든 것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절에는 주님의 수고 수난에 한없는 감사와 사랑을 드린다.

따라서 전례 성가는 인간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정성과 사랑을 노래에 실어 그분께 드리는 봉헌이다. 전례와 성가, 그 뗄 수 없는 관계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 성교회의 전통적 음악은, 다른 모든 예술적 표현 방식보다 뛰어나며, 그 가치를 이루 다 평가할 수 없는 재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특히 말과 결부된 거룩한 노래로서, 성대한 전례의 필요하고도 불가결한 구성 요소를 이루기 때문이다”(전례 헌장, l12항).

또한 오랜 전통을 통해 거룩한 교부들 역시 성가에 대해 훌륭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교황 성 비오 10세는 미사성제에 있어서 성음악의 봉사적 임무를 뚜렷하게 밝힌 바 있다.

 

 

기도하듯 감동으로

 

전례 성가는 팝송이나 유행가와는 다른 감동으로 부르게 된다.

교회라는 초자연의 신비가 물씬 풍겨 나는 분위기는 유독 특별한 전례 안에서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인간의 감정은 자연스레 감동과 정성이 넘치게 되기 때문이다.

 

성가를 감동과 정성으로 노래할 때 성가는 비로소 더 은혜로운 기도가 된다.

특히 그 주일의 복음이나 전례의 성격을 주제로 한 노래 가사를 깊이 묵상하며 부를 때 성가는 우리의 마음을 하늘 높이 승화시키며 삶의 순간순간이 사랑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번잡스런 일상을 떠나 지긋이 눈을 감고 가사의 뜻을 깊이 새길 때 거기엔 미움도 한숨도 안타까움도 그리고 실망이나 쓰라린 삶의 회오란 있을 수 없다.

오직 주님의 한없는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성가의 시작은 원래 가사(歌辭)에서 출발하였다.

특히 구약의 시편을 노래할 때 그것은 바로 노래이기 전에 인간의 감정을 전이시키는 하나의 탄원이요 애소이다.

시편 한 구절 한 구절은 우리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두려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절대적인 귀의와 신뢰, 사랑의 갚음, 하느님 계시는 데로의 신비로운 우리의 승화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편의 구절구절은 가톨릭 성가의 첫 모델이다.

이는 하느님 말씀인 시편을 더욱 뜻 깊고 아름답게 또한 간절히 가도하려는 데에서 성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의 모든 전례에서 응송 시편을 애써 노래로 부르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찬미의 서’(書)라 이름하는 성영(聖詠)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노래가 아니다.

시편은 거의가 ‘없는 이들’(인간)이 ‘스스로 있으신 분’(야훼 하느님)을 노래한 것이다.

즉 모세와 함께 소박한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독특한 체험을 통하여 그들만의 유일한 하느님을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시편의 노래는 마음에 새기는 일이 중요한 만큼 가락이나 박자가 좀 틀려도 그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만일 시편을 박자나 곡의 기교에 중점을 두고 부른다면 이스라엘의 중요한 ‘하느님 사랑의 체험’을 도식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루르드에서 저녁 로사리오 기도를 경험해 보신 분이 있으면 틀림없이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수천 명의 신자들이 제각기 다른 말과 다른 박자로 루르드 성모님 노래(묵주 기도 성가)를 부르지만, 그 노래에 트집을 잡는 사람은 없다.

다만 가사를 음미하는 열성이 지극하여 박자가 틀려도 개의치 않고 다만 그 기도의 은혜, 묵상의 감격에 묻혀 눈물을 흘릴 뿐이다.

 

성가는 모름지기 누가 얼마나 정확하게 박자에 맞춰 부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사의 뜻을 얼마나 깊이 새기며 부르느냐 하는 데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노래하는 마음에 따라 은총의 풍부함을 제각기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전례를 도외시한 감격 · 감동 위주의 노래는 도리어 기도의 은혜로움을 망각하게 하므로 조심해야 한다.

 

 

우리말 우리 노래를 부르자

 

모든 것이 부족한 시대에는 많은 것을 수입하여 부족한 만큼의 양을 채우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문화나 문명의 수입은 영원하고 이 세상 종말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나 교회도 웬만큼 외국에서 빌려와 모든 것을 채운 지금 우리의 문화나 문명을 계승 발전시켜 밖으로 내보낼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수입에만 의존한다면 우리 고유의 얼이 혼탁되고 더 나아가서는 단일 민족 국가 존립에 위기를 가져올 것이다.

 

성가도 이제는 우리말 노래, 우리가 만든 노래로 바꾸어 불러야 한다.

불러도 알아듣지 못하고 들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외국 말 노래는 한국이라는 땅에 뿌리박은 우리 민족, 우리 고유의 얼이 숨쉬는 생활 성가가 될 수 없다.

전례 성가는 ‘삶의 노래’인 만큼 노래 자체로서만 만족한다면 성가로서의 의미가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성가의 참뜻은 가사를 기도하는 데 있고, 그 가사에 민족 고유의 곡조가 붙여져 민족의 얼이 살아 있는 노래가 될 때 비로소 생활 성가가 되기 때문에 우리말 우리 노래, 우리 얼이 담긴 노래는 갈수록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성가란 흘러 지나가는 어떤 소리가 아니라 가슴과 심장, 오장 육부를 거쳐 요동쳐 오는 우리의 감동이요 얼이 담긴 ‘삶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이 뛰놀고, 얼이 감동으로 찬양하고 감사하며 뉘우칠 때 우리는 비로소 신앙인의 삶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것이고, 아울러 신앙은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만이 우리의 삶 속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며 이때 성가는 자기 몫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전례 중의 성가는 이제 웬만한 성당에서도 우리말, 우리 노래를 부르고 있으나 아직도 큰 전례나 성사 집전 미사 또는 주교님을 모시고 드리는 대축일 전례 등에서는 아직도 외국 성가를 즐겨 샤용하고 있다.

물론 전례 성가의 발전이 로마를 중심으로 오늘에 이름은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대축일 미사나 전례 중에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며 부르는 외국 말 성가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꼭 그래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을 묻게 한다.

미사성제를 돕는 성가가 ‘소리의 성가’로밖에 들리지 않는다면 이는 누구의 탓인가?

소리는 소리일 뿐이지 결코 찬양이 될 수 없다.

소리가 내포하는 그 뜻이 바로 찬양이요 신앙이기 때문이다.

 

우리 노래를 찾아 부르자.

“우리 밀 살리기 운동”처럼 우리 삶과 우리 몸에는 우리의 음식, 우리의 곡식이 제격이듯 우리의 정서와 혼, 우리의 넋을 노래함이 우리의 신앙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토착화 운동이란 우리들의 삶에 영양이 되는 우리의 얼과 정신이 담긴 우리의 것으로 옮아가자는 것이다.

무조건 옛날로 돌아가는 복고주의 운동이 아니라 지난날의 값진 유산을 오늘과 내일에 뿌리내려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자는 데 그 뜻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다음과 같은 말로 고유 음악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어떤 지방 특히 포교 지방의 국민들은, 그들의 종교 생활이나 또는 사회생활에 있어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고유한 음악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종교적 감정을 형성하기 위해서나 그들의 특성을 전례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음악에 정당한 평가와 합당한 자리를 부여하여야 한다”(전례 헌장, 110항).

 

성가를 부르는 성가대의 의식 변화 또한 있어야 한다.

외형적이고 전시적 경향, 소리 내기에 급급한 노래에서 뜻을 알리고 살아가는 삶의 노래로 전향해야 한다.

화려한 외국 말 노래는 성가대의 위신이나 취미에 맞고 또 신이 나게 할지 모르나 순박한 우리네 신자들에겐 음악 감상이 되기 쉽다.

전례 성가는 감상이기 전에 삶의 반성이어야 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는 귀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가대의 임무는

1) 신자들에게 성가를 친숙하게 접할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하고,

2) 신자들에게 감동을 줄 뜻 깊은 성가를 연습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해 주며,

3) 미사 전례를 더욱 풍성하고 은혜롭게 이끌어 주어야 한다.

 

 

본당 신부와 전례 성가

 

일반적으로 그 성당의 성가 분위기는 본당 신부에게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가 봉사자, 선창자, 성가대, 전례 담당 수녀 등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본당 신부의 말 한 마디보다 더 큰 힘을 가지지 못한다.

그만큼 본당 신부의 전례에 대한 영향은 지대한 것이다.

다행히 대부분의 본당 신부들은 성가의 활성화를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지만 가끔은 ‘성가 없이도 미사만 잘 지낼 수 있다.’고 호언하는 본당 신부도 있다.

물론 성가 없이도 미사는 가능하지만 미사를 미사답게 하느님의 은총을 좀 더 생생하게 체험하기에는 성가 없이는 무리이다.

전례를 전례답게, 대축일이면 대축제의 기쁨을 성가는 한층 더 생생히 느끼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성음악은 혹은 기도를 감미롭게 표현하거나 일치를 초래하며, 혹은 거룩한 의식을 더 성대하게 감싸 주면서, 전례 행위와 밀접히 결합하면 할수록 더욱 거룩해질 것이다.”(전례 헌장, 112항)라는 공의회 정신은 성가의 이런 역할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경향잡지, 1993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