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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4월21일 빠르잠의 성 곤라도 수도자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4.
축일 4월21일 빠르잠의 성 곤라도 수도자

축일  4월21일 빠르잠의 성 곤라도 수도자

 

St. Conradus a Parzham

San Corrado Birndorfer da Parzham Religioso

St. Conrad of Parzham, OFM Cap. (AC)

St. Conrad's Capuchin-Franciscan

 

 

곤라도(1818 - 1894)는 바바리아 지방 빠르잠 근처의 농촌에서 가난하지만 독실한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복되신 동정녀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매일 로사리오를 바쳤다.

젊은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후 하느님과 보다 깊은 일치를 위해 자신의 상속권을 포기하고 까푸친회에 평형제로서 입회하였다.

서원 후에는 유명한 "자비의 어머니 마리아" 성지인 알떼팅에 파견되었다.

그는 여기서 성지를 찾아오는 가난한 순례자들에게 봉사하는 짐꾼의 직책을 받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40 여년 동안 자신의 직책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곤라도는 특히 성체성사에 집중하는 끊임없는 기도 생활로 이름 높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성 콘라드는 파르챰의 바바리아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배우지 못한 시골 사람이지만 매우 신심이 깊었으며, 아홉 자녀를 두었는데, 콘라드는 막내둥이였다.

어릴 때부터 그는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께 대한 깊은 신심 속에서 성장하였다.

양친을 여읜 후, 31세의 나이로 카프친회 평수사로 입회하여 1852년에 서원을 발하였던 것이다.

그 후 그는 40년 동안 문지기 수사로서 봉사했는데, 순례자들의 무리가 끊임없이 몰려들었으므로, 애덕과 인내를 실천하며 사도적 정열을 불태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그는 특히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은혜를 받았고, 미래의 일을 알리는 은혜를 입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사후 40년이 되는 1934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콘라도는 1818년 독일의 바바리아 주 바쏘 교구이 작은 촌 파르잠(Parzham)에서 소박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건한 모친은 교육을 받아 어려서부터 성덕에 출중해 그 당시는 아주 드물게도 7세에 첫 영성체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어렸을 때부터 벌써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누구도 그의 앞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자는 없었다.

그는 어려서 양친을 잃어 일찍부터 고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세상 재물에 휩쓸리는 일은 없이 소년 시절을 깨끗한 백합화같이 보냈다.

그것은 물론 그가 신심생활에 열심했기 때문인데, 세속을 떠나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전답을 지키며 끊임없는 기도로 하느님과 영적 교제를 해 온 덕분이다.

참으로 그는 기도를 극히 즐겨 노동으로 피곤해졌음에도 여전히 무릎을 꿇고 밤을 새운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 열심한 청년은 1851년 9월 17일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본받아 카푸친회 평수사로 입회해 수도회의 가난한 수도복을 걸치게 되었다.

그리고 1852년에 엄숙한 서원 의식을 마치고 나서는 장상의 신임이 유난히 두터워 중책임인 알도에팅에 있는 성녀 안나 수도원의 문지기 직책을 맡아보게 되었다.

 

그는 이 직책에 충실히 근무한 40여 년 동안, 세월의 흐름에 따라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대단히 힘든 때도 있었던 문지기를 조금도 불쾌한 안색을 보임이 없이 성심 성의껏 완수하며, 그 유명한 영지를 찾는 모든 방문객에게 온화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미소로서 접대하여 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콘라도는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고요한 수도 생활을 보내며 기도와 고행으로써 숭고한 완덕에 도달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았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 줄때는 무슨 좋은 말씀이나 훈계를 권면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애덕은 자신의 양식을 절약해 궁핍한 자에게 베풀어 줄만큼 대단했다.

특히 가난한 이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아이들 측에서도 그를 따르게 되어 그의 훈계를 잘 따랐고, 그도 그들을 만날 때 마다 항상 마음을 터놓고 재미있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빵 같은 것을 나누어 주기 전에는 그들에게 기도를 바치도록 했다.

이는 아직 죄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의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풍부한 은총을 내려 주시기 때문인데, 콘라도는 사실 그들의 기도에는 많은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몇 년 후 그 아이들 중 몇 명은 사제가 된 자도 있었는데 이는 오로지 콘라도의 착한 지도와 기도 덕분이라 하겠다.

 

"우리는 기도해아 한다!" 이는 늘 콘라도가 했던 말씀이다. 그는 그 말과 같이 실지로 기도를 많이 했다.

새벽 3시만 되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바치기 위해 성당으로 급히 갔다.

그리고 그가 기도에 몰두해 하느님과의 상통으로 말미암아 만사를 잊고 있을 때 그의 입에서 불꽃이 나오며 그의 몸에서 후광(後光)이 비치는 것을 본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수사 콘라도는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기도했다.

그는 또한 수난하신 주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매일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때로는 몇 시간이나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있을 때도 있었다.

 

수사 콘라도의 생애는 고요히 지나가, 마침내 하느님께서 1894년 4월 21일 이 충실한 종을 영원한 나라로 부르셨다.

때는 마침 토요일 저녁이었고 삼종소리가 읍내를 지나 은은히 먼 들로 사라지는 때였다.

그의 죽음을 전해서 들은 사람들은 모두 "성인이 돌아가셨다"고 하며 그의 죽음을 섭섭히 생각지 않은 이 없었다.

 

살아 있었을 때 자선사업을 많이 행한 콘라도는 사후에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많은 가난한 사람들, 고생하는 사람들은 그가 천국에 있으면서 계속 자기들에게 도움을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때로는 그의 묘지를 순례하고, 때로는 그의 전구를 구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풍부한 효험이 있는 것을 보고 콘라도에 대한 신뢰의 정은 점점 높아졌다.

그의 전구로 많은 은혜를 받은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1930년 6월 15일 복자품에 오르고, 다시 1934년 5월 20일 성령 강림 대축일을 계기로 장엄한 예식의 거행 중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