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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묵상글 모음

항상 더 크신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21.
항상 더 크신

항상 더 크신

 

 

저는 로마에서 공부하면서 몸이 썩지 않는 많은 성인들도 많이 보았고,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 성체와 성혈도 란치아노에서 보았습니다. 이런 것들을 많이 보다보니 웬만한 기적들을 보고는 잘 놀라지 않습니다.

 

한 번은 아씨시에서 부제실습을 하던 친구가 그 근처에 한 성인이 있는데 심장에서 십자가가 나왔다고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심장에서 십자가를 넣고 다니면서 사람이 살 수가 있었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잘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함께 가서 보니 정말 심장 근육이 뭉쳐져서 십자가 모양이 새겨졌고 자세히 보니 그 위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형상도 있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수난하실 때의 수난도구들, 즉 채찍, 못, 가시관, 묶이셨던 기둥, 해면이 달린 장대 등이 심장에 다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8백여 년이 지나서 근육이 좀 뭉개져서 지금은 다른 것들보다 크게 새겨졌던 십자가와 채찍만이 형체를 그나마 유지하고 있으나 그런 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성인의 몸은 굳지 않아 몸을 접었다 피면서 옷을 갈아입힐 정도이고 심장도 물만 조금만 있으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세포조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것을 보았다고 하여 잘 믿으려 하지 않았던 제 자신을 돌아보며, 세상엔 나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들이 항상 존재하고 있음을 다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여행하던 친구가 유적지들보다는 자연경관이 더 좋다고 말할 때, 저는 스위스의 산도 보고 유럽의 여러 유명한 자연광경도 많이 보아서 더 이상 놀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저는 오히려 인간이 만든 역사 유적지가 더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고 보았던 이구아수 폭포는 세 시간 동안이나 제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이 아니면 이런 것을 만들 수 없다는 생각에 겸손해지며 저절로 기도가 나왔습니다.

 

어렸을 때 강냉이 아저씨가 강냉이를 거저 준다고 했을 때 저만 빈손으로 나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릇을 가져왔던 아이들은 그 그릇들 가득히 강냉이를 받아갔지만, 저는 그 분이 그렇게 자상한 분일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사실 제 자신이 인색한 사람이었기에 강냉이 아저씨도 인색할 것이라 규정해 버렸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말할 때 잘 믿게 되지 않는 이유는 내 한계로 그 사람을 한계지어 가두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즈카리아도 하느님을 자신의 기준으로 가두어 버리고 자신과 같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아들을 줄 수 있는 분이라고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심 자체이신데도 말입니다.

 

인간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클 수 있는데, 하물며 하느님을 규정해 버려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태인들은 글을 초등학교 3학년이나 되어서야 가르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가르치면 생각이 규정되어 버려 창의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숫자상으로는 얼마 되지도 않는 유태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민족이 되었나봅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느님을 규정하여 금송아지를 만든 적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데려 내온 하느님을 만들자고 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한계 내에서 상상할 수 있는 하느님의 최대한이 금송아지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나 로마 신화의 신들은 인간들만큼이나 불륜을 저지르고 살인과 싸움을 일삼습니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신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인간이 상상해 낼 수 있는 것보다 항상 더 크신 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주관으로 하느님을 규정하면 하느님의 놀라운 일은 절대로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 같은 사람은 하느님께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비 ‘자체’이신 분입니다.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기준으로 하느님을 한계 지어버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은 자신 같은 사람은 사랑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사랑 자체는 사랑밖에 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옥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느님은 정의 자체이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당신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박아가면서까지 정의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세상을 존재하게 하신 존재 자체이시기에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존재 자체이시기에 모든 것들을 존재하시게 한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어 모든 것을 규정해버리려는 교만을 버려야합니다. 그래야 믿을 수 있습니다. 겸손해 진 사람은 마땅히 하느님도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항상 크다는 것을 알고 머리로 이해하려하지 않고 믿으려 합니다. 인간의 사고는 시간과 공간에 한정되어 있지만 하느님은 시간과 공간을 만드신 분이시기에 우리 생각보다 항상 더 크신 분이십니다. 항상 더 크신 분은 우리 한계 지어진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믿을 대상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수원교구 오산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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