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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묵상글 모음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21.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

 

 

1983년 영국 이스트본에서 열세 살 소년이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토머스 크레이븐. 소년은 모범생이었으며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소년이 왜 자살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 가정은 악마의 저주를 받아 가족들이 일찍 죽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죽음이 두렵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어머니 곁에서 죽는 편이 낫다.”

소년을 죽인 범인은 ‘악의에 찬 헛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 소문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정에 적개심을 품은 한 노인이 퍼뜨린 유언비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두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 29)라고 하신 말씀은 어떤 이들에겐 은총이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겐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눈이 멀었던 소경은 예수님을 믿었기에 시력을 되찾았지만, 토머스 크레이븐이란 아이는 헛소문을 믿었기에 소문대로 일찍 죽게 되고 말았습니다.

받아들이는 대로 믿게 되고, 믿는 대로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어떤 것은 믿어야 하고 어떤 것은 믿지 말아야 하는지 구별할 수 있을까요?

사탄은 하와를 유혹합니다.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과 같아진다고 믿게 합니다.

 

물론 하와가 죄를 지으면서 선과 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는 같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하느님나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무엇을 받아들이고 믿을 것인지, 무엇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을 것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악에서 오는 것도 반드시 악의 특징이 있고, 선에서 오는 것도 반드시 선의 특성이 있습니다.

 

루르드의 물은 세계에서 가장 완전한 육각수의 형태를 지닌다고 합니다.

이 물을 마시고 성모님께 기도하고 수많은 병자들이 치유되었고 지금도 치유되고 있습니다.

이 물이 발견되게 된 경위를 그 곳에 사시는 수녀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이 샘물은 성녀 베르나데트가 성모님을 만나면서 성모님께서 가르쳐주신 곳을 손으로 파내었기 때문에 솟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처음으로 가르쳐주신 곳은 구정물이 모여 있는 악취가 나는 웅덩이였다고 합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가 그 웅덩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더러운 물을 마시고 그 주위에 자라는 풀을 뜯어먹기를 원하셨다고 합니다.

아무리 성모님이지만 너무 지저분한 것을 시키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그 웅덩이를 손으로 더 파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곳에서 깨끗한 샘물이 솟았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를 통해 은총을 주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르나데트의 순종을 시험하십니다. 그 시험을 통과하자 그녀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은총을 입게 됩니다.

 

사탄이 우리가 믿기를 원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우리가 믿기를 원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사탄이 원하는 것은 하기가 쉽지만 죽음이 온다는 것이고, 하느님이 원하는 것은 하기가 어렵지만 생명이 온다는 것입니다.

 

토머스 크레이븐이란 아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더 이상 견뎌나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죽음이 싫어서 싸움을 포기하고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항상 더 어려운 쪽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항상 더 좁은 문, 더 힘든 길을 가라고 합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하셨던 순종의 모습을 똑같이 베르나데트에게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도 성모님께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라고 하십니다. 구세주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구세주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광 이전에 십자가를 져야 함을 의미했고 성모님도 그에 따를 고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시며 순종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순종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그녀 안에 잉태되시고 영원한 복으로써 세상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바라보면서 그 호기심과 욕망을 참아내기를 원치 않았고, 그리스도와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고통을 순종하여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 차이입니다.

내가 첫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 되느냐, 아니면 두 번째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 되느냐는, 내가 하기 편한 것을 믿어버리느냐,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느냐입니다.

 

저는 고 3때 시골에서 하루 3시간씩 통학하며 너무 고생을 많이 하고 게다가 성적도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가장 싫은 것이 공부가 되어버렸습니다.

군대 제대하고 대학생활을 잘하고 있는데 사제가 되라고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저는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제 자식을 보내면 보냈지 저는 못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께는 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신학교 한 학기가 끝났는데 수석을 하여 장학금을 탄 한 동기 신학생이 “형은 공부도 많이 하면서 성적이 잘 안 나왔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한 저는 하느님께 당하는 지도 모르고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유학가라는 말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가장 싫어하는 것이 공부라고 하였고 그 때는 기도가 공부보다 훨씬 재미있었기에 혹시 유학가라는 말이 나오면 안 간다고 교수 신부님께 미리 말해 놓은 터였는데도 그렇게 명령이 떨어지니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학하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워서 돌아올 때는 유학 나오기를 참 잘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다시는 유학을 안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다시 유학가라는 주교님의 말에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공부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본당주임을 막 나가려고 하는데 주교님께서 다시 유학을 가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더니 한 달 동안 장상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 따르지 않아야 하는지 묵상하고 연락하라고 하셨습니다.

 

보름 정도 묵상한 뒤에 가겠다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쉬운 쪽보다는 힘든 쪽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깨달은 것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나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시는데, 그런 모든 것들은 ‘다 내가 하기 싫어하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기 편하고 좋은 것을 시키시면 더 이상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목소리는 아닙니다.

 

오늘 성모님도 당신의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겟세마니에서 그리스도께서 순응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Amen!" 하시는 것입니다. 그 순종으로 생명의 열매가 맺혔고 세상에 구원이 내려왔습니다.

 

공부는 싫어도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합니다. 일은 싫어도 돈을 벌기 위해 합니다. 모든 열매는 이렇듯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뜻 또한 고생스러운 것입니다. 그 고생을 통해 달디 단 열매를 맺게 해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모님이 잉태되게 하시기 위해 성모님처럼 오늘 지고가야 할 십자가도 Amen 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를 비워나갑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수원교구 오산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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